범민련 초대 의장이던 강희남 목사 영결식 10일 서울에서..

고 강희남 목사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초대 의장이었던 강희남(89) 목사가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긴 채 지난 6일 오후 7시45분경 전북 전주시 삼천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강 목사는 유서를 통해 “지금은 민중주체의 시대다. 4·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주체가 없다. 제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라고 말했다.

강 목사는 이달 초부터 남북관계의 경색을 우려하며 단식투쟁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범민련을 창설하고 통일운동을 이끌었던 강희남 목사는 붓글씨로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라고 쓴 글도 남겼다.

한편 강희남 목사는 유서 외에도 유족들에 따르면, 이글과 함게 지난 5월 1일 유서 성격의 마지막 고별사로 '8천만 동포들' 앞으로 편지를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강 목사는 단식에 앞서 쓴 이 글에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 명이 순절했고 송병선 선생이 남긴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내 가슴에 사무쳤다"고 고백하면서,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 처럼 양키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하나로 멍든 가슴에 안고 내집을 내집을 양키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라고 맺었다. 

그동안 강희남 목사는 1994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범민련 남측 본부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조문을 시도했다 구속되기도 했으며, 1970년대에는 유신반대 투쟁으로 구속되고, 1986년에는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편 <조선일보> 홈페이지인 조선닷컴에서는 강 목사의 죽음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하며 "유서 내용은 '주체'를 강조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을 '리명박'이라고 표기하는 등 친북적 성격을 띠고 있어 논란이 일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고 강희남 목사 장례준비위원회는 7일 오후 '통일민주사회장'으로 5일장을 치르고 영결식은 10일 오후 1시쯤 서울 향린교회에서 열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따라서 10일 오전 8시 발인식을 한 뒤 서울로 운구해 오후 1시께 향린교회에서 영결식을 갖고, 다시 전주 승화원으로 옮겨져 화장한 뒤 전주시 효자추모관 납골당에 안치될 예정이다. 

공동장례위원장으로는 강희남 목사의 유지에 따라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을 선임할 예정이며, 분향소는 우선 범민련서울사무소에 제 1분향소를 설치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을 비롯해 가능한 대학 및 병원 등에 추가 분향소를 열어 추모객들을 맞기로 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마지막 고별사
8천만 동포들에게

더는 그만두고 왜놈들과 강제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명이 순절했는데 그중에도 민영환 선생을 모시던 일력거꾼이 뒤를 따라 자살했고 송병선 선생댁 소녀 식모 공림이 식도로 목 찔러 죽었다. 송병선 선생은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않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이 항상 식민지 백성된 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돌아 보건데 1945년 종전 공간에서 양키 제국주의자들이 제 맘대로 38선을 그어 쏘련 측의 동의를 얻어 국토를 량단해 놓고 마땅히 전승국 대우를 받아야 할(북에서 쏘련군은 그렇게 했음) 이 땅의 주인이 자기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군정에서 북의 쏘련군과는 정반대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함과 동시에 상해 림정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완전 배제해 버림으로 이 땅의 역사를 개판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 등 애국지사들을 차례로 제거해 버리고 저들의 똘마니 리승만을 세운 뒤 소위 비밀주권을 움켜쥐어 오늘날까지 무불간섭이요 무불착취다 포츠담선언에 의해 48년 북에서 쏘련군이 철수하자 양키군들도 49년 7월에 일단 철수했으나 저들은 곧 이를 후회해서 이땅에 재상륙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함으로 에치슨 라인을 설정하여 일본까지만 자기들 방위선 안에 두어 지키고 한반도는 방위선 밖에 버려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북측에 보여줌으로 북을 유인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 땅을 재점령한 뒤에 전쟁끝나고 북에서는 중공군이 완전 철수했느나 저들의 군대는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이땅 식민지화에 200%쯤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또 방위동맹의 차원에서 우리 령토 령해 령공 할 것 없이 완전히 자기들 임의에 맡겨있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방위동맹은 허울뿐이고 완전히 례속동맹인 것이다.

력사와 민족위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분로하고 통탄하지 않겠는가? 실로 해저믄 날 따옥이 소리에 한숨?고 북으로 날아가는 기럭이 울음에 눈물?던 새월이 얼마이던가? 외세 척결과 민족통일을 바라 쓸모없이 늙은 이 한 마리 학은 목이 길어서 더욱 서럽다.

통일운동은 바로 양키추방 운동과 직결된다는 신념으로 오랫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이 땅의 괴리정권과 보수주의 매국로들의 세상에서 이란격석이 아니었던가? 이 치욕스러운 력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엣 어른들은 "가이생어사(可以生於生)이오 가이사아사(可以死於死)라 가히 살만한때에 살고 가히 죽을만 한때에 죽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살아도 애국이요 죽어도 애국이 있을 뿐이다.

나는 민족적으로 못하면 개인적으로라도 그들에대한 노례신분 청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 있음을 어찌하랴? 내가 대전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절식(단식)으로 운명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는데 내가 선생을 부액해 모시고 가면서 춘추를 물으니 73세시란다. 그렇다면 나는 선생보다 17개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이것도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는다.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오자서가 목숨을 피해 오나라 망명길에 올으면서 피떵이 같은 어린 왕손 승을 안고 그 천신만고 9사1생의 길을 간 것은 오직 그 어린애만이 장차 초나라 왕통을 이을 존재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 처럼 양키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하나로 멍든 가슴에 안고 내집을 내집을 양키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

단기 4342(2009)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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