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박종태 씨의 죽음을 보며

▲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5월 3일 한 노동자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화물연대 노동자인 박종태(39) 씨다. 그가 원한 것은 대한통운의 78명 해고자 복직이었다. 용산참사를 당한 유가족이 박종태 씨의 부인을 위로하러 대전으로 내려가 만나는 모습이 인터넷 뉴스에 실렸다. 같은 상복을 입고 그 유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린다. 참 가혹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아픈 모습을 외면하면 이러한 고통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내가 살던 인천지역에서도 몇 년 전 한 해에 3명의 노동자가 죽어갔다. 노동자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예전에 노동사목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떠나간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기억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이렇게 해마다 계속되는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은 언제 끝날까?'라며 생각해 보지만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의 죽음에 침묵할까? 이 고통의 시대를 끝내자고 말할 이 시대에 의인은 없는 것일까? 왜 이렇게 반복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무력할까? 이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정말 우리 사회는 의인이 없고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는 침묵의 사회일까?'라고 질문해 본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The Good Samaritan Law)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을 발생시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 주지 않은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 법은 근본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윤리적인 문제라고 설명한다. 예수가 살았던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는 서로 적대하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강도를 당한 유대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동족인 유대인들은 외면하고 가는데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구해주었다.

미워하고 질시해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베푼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다. 곤경에 처한 노동자들이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착한 사마리아 법'을 적용한다면(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우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해와 포용도 없는 탐욕스러운 괴물로 자리 잡은 자본이라는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인간의 보편적 사랑을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쌍용자동차에서 해고통보를 받은 2,646명의 해고노동자, 대우자동차 1천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장기휴업과 해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374명이 해고되어도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못하고 힘없이 발걸음을 되돌리는 이 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를 헤맨다.

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장에서도 노동자들은 위기에 처해 있다. 처음부터 자본이 괴물은 아니었다. 자본에도 인간의 결 고운 심성처럼 함께 공존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밥이 되는 좋은 자본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한 자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공생이 아니라 구분하고 버리고 외면하고 그러다가 자신의 모습이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한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추악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본이 늘어가고 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가르쳐 왔다. 노동의 인격적인 가치를 부여해 주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 원리’를 강조하였다(노동하는 인간, 15항). 다시금 질문해본다. 우리 시대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한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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