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하는 삶", 로완 윌리엄스, 비아, 2015

누군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가?"부터 "신앙이 당신에게 무슨 득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예수의 죽음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교회를 왜 다니는가?", “영원한 삶을 믿는가?” 등등에 관한 궁금증들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사제나 신학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신앙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올 양이든 단 한마디 정의든 말이다.

▲ "신뢰하는 삶 -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 로완 윌리엄스, (김병준, 민경찬), 비아, 2015. (표지 제공 = 비아)

2005년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는 부활절을 앞둔 몇 주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 관해 신자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윌리엄스는 그리스도교 언어에 익숙하지 않는 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언어로 그리스도교 전통 신앙 고백문인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을 해설하였다. "신뢰하는 삶"은 이때의 녹취를 글로 옮기면서 확장한 책이다. 윌리엄스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교리를 다시 주입하는 방식으로 두 신경을 풀어 가지 않았고, 책 전체에 그가 알고 있는 하느님과 신앙의 삶을 펼쳐 놓고 두 신경의 구조를 따라 안내하면서 그 끝에 있는 하느님나라로 이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오랜 종교 관습의 묵은 때가 씻겨져 나갈 때, 그 속에 있던 신앙의 핵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된다.

윌리엄스에게는 신앙 고백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부터 출발한다.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의심과 거짓의 혼돈 속에서 늘 불안에 쫓겨 쉼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본래 있어야 할 '집'을 떠나왔기 때문이며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므로, 신앙 고백은 우리에게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단하게 한다. "믿습니다(Credo, 크레도)"로 시작하는 두 신앙 고백문은 가장 먼저 “믿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을”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관계의 회복으로 불러들인다. 신앙 고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일단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온 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 신뢰를 단단히 붙들어 매는 것뿐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이 온전한 신뢰의 관계에 뿌리박은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그가 하느님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자기 삶으로 옮겨 왔기 때문이다. 그 삶은 하느님과의 신뢰에서 사랑의 말씀을 실천하고,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나보다 하느님이 옳다는 것을 신뢰함으로써 기꺼이 자기를 죽음으로 내던진 삶이다. 윌리엄스는 예수의 삶의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예수의 삶이 곧 하느님을 신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 내야 할 삶이라고 강조한다. 이 삶은 오롯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인간 본성이 지닌 자기애-두려움과 갈망-를 내려놓고 자기를 내어 준 행동으로 드러난다.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의 이러한 삶이 진리며 참 사랑의 실현임에 동의하면서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잘 알고 있듯이 예수의 삶은 '더 큰 위험'이 따른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이 삶을 살겠다고 응답할 수 있는 건, 자기를 버리는 사랑만이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을 향한 신뢰다. 그 신뢰 안에서 우리는 이기심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살 때에 '나'는 '우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게 된다. 하느님의 목적은 평화와 찬미, 화해, 기쁨이다. 하느님나라에는 이기심이 존재할 수 없으며, 하느님은 인간 정신에 깃든 당신의 지혜로써 인간이 사고하고, 자유의지로써 행동하여 이 목적을 이루는 주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신뢰에서 비롯한 사랑의 활동을 할 때에 이 활동은 성령이 함께하는 예수의 활동이 된다.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 전체의 반을 차지하며 중심 자리에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예수의 삶이다. 윌리엄스는 예수의 삶에 '깊이 잠긴'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라고 정의하면서, 하느님나라는 이러한 교회에서 시작되며, 교회는 철저히 '타자와 함께'라는 모토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와 함께 엮이며 겪음으로써 서로 돕고 의지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세상에서 '자신을 내어 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살아갈 때, 그래서 그 담대함이 만물의 핵심에 자리 잡을 때 세상의 부조리와 거짓들이 비로소 종식된다. 즉, 그리스도인은 신뢰에서 나온 사랑의 행동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 존재는 언제나 자기애라는 감옥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애냐 사랑이냐, 나아가서 사랑으로 둔갑한 자기애냐를 분별하고 식별하여 선택의 결단을 놓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윌리엄스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균형 잡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두 신경이 고백하는 하느님, 예수, 성령과 하느님나라에 대한 신뢰를 붙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조(기도)하는 삶이다. 관조로써 하느님을 보는 체험, 즉 하느님 사랑,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집, 그 생명 한가운데에 거하는 온전한 나 자신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관조는 우리가 사랑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양극 사이에서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된 채로 위태롭게 살아갈 것이다. 올바른 결정은 크든 작든 자기죽음이라는 관문을 넘어서야 할 일이며, '그럼에도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고백하고 결단하는, 그리스도 앞에서의 매일의 심판이다.

중요한 것은, 자주 실패하더라도 여전히 하느님은 나의 신뢰의 대상이며,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자신을 열어 내어 줄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이 열림은 우리를 참 자유가 있는 영원한 삶으로 이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영원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순전한 실재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쌓아 놓은 수많은 가면들을 벗어 내는 과정에서 일순간 하느님 앞에 설 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본래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을 체험한다. 여기서 체험한 신적 자유는 신적인 삶으로 이끄는 힘이 되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더 돈독해짐으로써 자기 의지로 또 다시 사랑이 되기를 다짐한다. 이것이 예수가 살아 온 삶이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에는 오직 인간이 참 사랑이 되는 길에 대한 동의와 신뢰가 핵심이다. 그는 “우리에게는 자신이 지닌 풍요로움에 완전히 도달한 교회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신뢰를 보여 준 다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신앙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한 것이며, 나의 성장은 우리의 성장이라는 것이다. 완전한 도달은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채워 주면서 함께 성숙해야 한다. 참 신앙은 신뢰와 사랑의 주체로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온전히 발붙여 참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내가 변화되고 세상도 함께 변할 것이다. 변화가 더딜지라도 우리는 신뢰하며 '함께 본다.' '그 끝없는 끝에 무엇이 이루어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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