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서 보낸 4년]

 

▲ 군위 간디학교에서 하는 농사일

군위 간디학교에서, 최악의 한 달

북 대구 터미널에서 군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시가 멀어지면서 산과 들이 많아졌다. 스치면서 지나가는 나무와 들을 보고 있으면 별에별 생각이 다 난다. 집에서 내가 너무 심했나, 일찍 올라와서 돈을 너무 많이 쓴 건 아닐까, 아이들 사이에서 균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선배들이랑은 또 어떻게 지내나, 같은 학년끼리 지내는 시간이 더 많으면 좋겠는데.............. 그 사이 버스는 어느덧 군위에 도착해있었다.

“난 학교 들어가는 거 좀 그래.”
“나도! 우리끼리 있는 게 편한데 괜히 선배들까지 같이 지내면......”

원래 학교에서는 2번 째 프로젝트로 전남 장성 한마음 공동체로 갔었다. 거기서 흙집을 짓고 천연염색도 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학년부터는 계획이 바뀌어서 학교로 가게 됐다. 장성에서 하던 일을 모두 학교에서 한단다. 뭔가 탐탁지 않은 이 기분이 그저 불길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우리가 했던 일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국토순례 예행연습도 하고, 일주일에 두 번 군위읍에 있는 스포츠 센터에 가서 배우고 싶은 운동을 선택해서 배우고, 농사를 짓고, 흙집을 짓고, 옷을 천연염색 해보고, 차를 타고 40분 정도가면 있는 옹기 마을이라는 곳에서 도자기 공예도 해보고, 학교 최고 의결기관인 식솔회(식구들의 솔직한 회의)에 참여하고, 학생들만 모여서 논의하는 학생총회도 들어 가보는 등 다채로운 일정 안에 놓이게 됐다.

생활 패턴도 푸른 누리에서 있을 때와는 달라졌다. 푸른 누리보다 길게는 2시간 많이 잘 수 있었지만 친구들은 여전히 품點末杉? 월, 수, 금은 전체모임을 하고 화, 목은 학년모임을 한다. 그날 공지사항이나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고 나면 학교의 일정이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 일정대로 움직이고 2,3학년은 수업에 들어가고 공강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그러나 나는 학교 프로젝트가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악의 한 달로 기억한다.

▲ 도자기 만들기

답이 나오지 않는 의사소통

나는 실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은 푸른 누리 막바지부터 조금씩 시작된 것이긴 했다. 처음엔 다 좋지만 영원할 수 없었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친구들의 단점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그런 것들을 느꼈고 친구들도 나와 다른 친구들에게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서로 성향이 안 맞는 사람들끼리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날카로워졌다. 상대방에 대해 여유가 없었다. 프로그램이 즐겁거나 새롭거나를 떠나서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었다.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힘든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했기 때문인 거 같다. 나는 이런 걸 이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정말 서툴렀다. 모든 게 다 짜증났다. 집에서처럼 답이 없는 의사소통이 연달아 일어났다. 아무렇지 않게 날아오는 짜증과 냉소가 우리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만 갔다. 전엔 생길 이유도 없던 오해들이 생겨나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돌아다니며 친구들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급기야 사이가 틀어지거나 대화가 안 된다며 차라리 입을 닫게 다며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무표정하게 말을 하지 않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친한 친구들끼리 패를 이뤄 다니고 그 중 몇 명은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됐다.

크고 작은 상처들

친구들 사이가 좋지 않으면 우리학교에서의 삶은 최악 중 최악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하면 밥을 먹으러 가도, 책을 보러 가도, 산책을 해도, 모임에 참여하러 가도, 심지어 외출을 해도 그 사람을 만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왜냐? 학교가 너무 작기 때문에 거기가 거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별이 같다면 무조건 같은 기숙사에 심하면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일 수도 있다.

▲ 정말 좋은 인연이었으면...
“저 나쁜 새끼 다신 안 본다.” 이런 게 우리학교엔 없다. 그러고 싶으면 둘 중 한 명이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해결을 하거나 아니면 문제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그래서 나나 다른 사람들은 미친다. 정면으로 문제에 직면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다들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실수가 많이 일어났다. 그 안에서 나와 친구들은 서로 상처를 많이 주고받았다.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는 3년 동안 상처를 주고받았는데 그때 받은 상처들이 가장 크게 와 닿고 아프지 않았나 싶다. 이젠 그런 말장난이나 냉소에도 아무렇지 않은데........ 하긴 3년이 지난 지금도 완성형 대화법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싶다.

졸업생 중 누군가 그랬다. “대학이나 사회에 나와서 겪는 일이나 그런 것들을 우리학교에 오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겪게 된다.”라고. 아무튼 그렇게 한 달 동안 얽히고설켜서 싸우다보니 어느 덧 한 달이 다 가 있었다. 밖에서의 삶은 정녕 이리도 정신없는 삶이란 말인가. 다음 주엔 소록도 앞 녹동 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들 집으로 흩어졌다. 다들 지쳐서 하는 말들이 “닥치고 봉사나 해야지.”였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