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뜻밖의 소식과 함께 한 1년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로마서 8, 25)

예전에 아주 많이 ‘사랑했던’ 성서 구절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라는 표현, 이 얼마나 믿음과 희망을 북돋우기에 좋은 비유인가. 아마 인간이 언어를 발명한 이후의 최고의 묘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멋들어진 문장이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읽고 되새기며 마음을 추스르곤 했었다. 억지건 진짜 위로였건 오래 전 그때는 이 말이 주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는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운명. 그것을 벗어날 도리는 살아서는 없는 것인가. 아마 깨달은 이들일수록 이 말이 끝내는 진리일 것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깨달음의 끝에서 마주하는 하느님은 분명 보이지 않기에 희망이신 그런 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받아들이기란 아무래도 속상한 일이다. 수사(修辭)의 최고 경지에 오른 ‘구멍 없는’ 문장에 대한 반발심도 있다. 이래도 저래도 그리스도인들은 패배한 듯이 ‘보이기’ 딱 좋은 위치에 놓여 있다.

희망을 믿는 자들은,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자들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패배자의 구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보지 못할 희망의 실체에 대하여, 내가 죽어도 쉽게 도래하지는 않을 듯한 어떤 좋은 세상의 꿈에 대하여, 막막한 기분이 들 때 이 구절을 떠올리지만 곧 다시 막막해진다. 우리는 이 문장의 권위 앞에서 다시 패한다. 무릎을 꿇리고야 마는 문장의 완벽함이 말문마저 막히게 하는 탓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때로 벽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아마 이 문장으로부터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갇힌 것이 아닌,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의미를 다시 새겨 넣어야 할 때가 아닐까.

 
2015년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영화들을 보았다. 그렇게 멀리까지 오직 영화를 보기 위한 목적만으로 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부산은 아침저녁으로 해운대 바다를 거닐다가 일정 삼아 영화 보는 시간표를 짜기 좋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첫 번째로 본 영화가 조창호 감독의 <다른 길이 있다>였다. 애잔하다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겨울의 춘천, ‘누에섬’이라고 불리는 얼음의 강과 땅, 거기에 웃음기도 눈물 자국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찾아온 남자와 여자. ‘검은 새’와 ‘흰 새’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만나, 미리 정한 대로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기로 한 이른바 자살공모자들이다. 배우 김재욱과 서예지가 열연했다.

▲ <다른 길이 있다>, 조창호 감독, 2015.
영화 <다른 길이 있다>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 공식 초청작이다. 영화제에서 소개한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전신 마비로 누워있는 어머니를 돌보는 딸이 있다. 이벤트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딸은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한다. 한편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 있는 남자는 지금 경찰로 일하지만 삶에 의욕을 잃는다. 둘은 우연히 동반자살을 계획한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기구하다. 어떤 반전의 틈도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이럴 때 체념이라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소리 내어 말하거나 울부짖지 않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일’과 ‘가족’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담담함이야말로 숨죽인 응어리들이다. 얼음장 밑으로 내내 흐르던 물이 한 순간 ‘해빙’을 만나 우는 소리를 낼 때처럼, 터져 나올 구멍을 찾는 서러움이다.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 혀를 깨물고 싶을 때, 정말 간절한 염원은 살고 싶다는 갈망이 아닐까.

죽고 싶을 만큼 살고 싶었던 이들. 가장 죽고 싶었던 순간에조차 나의 마지막 숨소리를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랐던 그 여린 마음. 얼음장 밑에 그래도 죽지 않은 숨구멍이 존재하는 간절한 이유다. 어떤 인생에게는 비극이 일상처럼 반복되지만, 그렇게 아픈 자리에서조차 삶에 대한 꿈은 뜨겁다. 그래서 얼음을 녹인다. 단 한 명만이라도 가냘픈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준다면 기적과도 같은 뜻밖의 희망도 찾아든다. 섭리란 오묘해서, 끝과 시작은 사실 인간의 손을 떠난 곳에서 몸을 바꾸곤 한다. 검은 새와 흰 새는 결국 삶을 붙든다. 서로의 안간힘으로 서로를 살려낸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흰 새가 가느다랗게 숨을 토할 때, 검은 새의 눈가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관객은 그제야 깊은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아, 살았구나. 산다는 건 저렇게 숨소리를 내는 거구나!

모자란 생각과 솜씨로 <뜻밖의 소식>에 ‘복음과 문화’ 꼭지를 써내려가며 독자들께 늘 고마웠다. 힘들었지만 참 보람 있었다. 지금은 여기까지, 하지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김원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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