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 로마노 과르디니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사상적 뿌리,
로마노 과르디니의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

▲ 로마노 과르디니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미 여러해 전에 바오로출판사를 방문했을 때, 몇 권의 책을 선물받았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 싶은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1968)의 편지 9통을 엮은 책이었다. 나에게 그 책을 건네던 수사님은 참으로 귀한 책인데 잘 팔리지는 않는 책이라고 소개했던 것을 기억한다. 왠지 맥 빠지게 착한 사람은 시선을 훔치지 못한다는 속설과 같은 맥락일까....

이제 이 책을 소개해야 할 명분이 생겼다. 그리고 읽어보면,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시선을 거둘 수 없어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으며 밑줄까지 그어서 마음에 새겨야 겨우 넘어갈 수 있는 구절들이 나타난다. 긴 가뭄에 갈라진 마음을 적시고, 뇌에 피를 돌게 하고, 정신 차려서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결심까지 하게 만든다. 번역자의 마음을 적시고, 그 젖어든 마음에서 다시 솟아나 힘있는 글이 된 까닭이다.

이 책을 소개할 명분은 지난 5월 24일에 새롭게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 – 우리가 함께 사는 집을 돌보기 위하여" 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적 기원에 바로 과르디니의 "근대의 종말"(Das Ende der Neuzeit, 1950)이란 책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번역판은 "불안전한 인간과 힘",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1999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지들로 엮은 이 책은 과르디니의 사상이 전개되는 방향과 폭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그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27년쯤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한 아름다운 코모 호수의 벨라지오에서 잠시 지내며 쓴 여덟 통의 편지와 그 뒤 2년이 지나 앞의 편지들을 종합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아홉 번째 편지는 교황의 새로운 회칙이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갈증을 달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더우기 신학의 대가가 내게 남긴 아홉 통의 편지를 한 세기가 지나서야 읽는 감격은 읽어보아야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그를 잇는 신학자가 칼 라너인 것을 고려한다면, 그의 신학적 위상을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겠다.

▲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사진 제공 = 최우혁)
속삭이듯이 말을 걸어오는 대가의 곁에서 그와 함께 아름다운 호숫가를 걷다 보면 그가 불어넣어 준 새로운 생명이 바로 복음이었음을, 내게 새롭게 두 발로 걷을 수 있는 힘을 주고 떠났음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마치 풀이 죽어서 엠마우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한 그리스도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그의 편지는 바로 가톨릭학생회에서 그가 지도하던 학생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이었고, 이제 우리도 그의 학생으로서 편지를 읽어보자. 아마도 독일에서 공부하던 베르골료 수사는 그 기쁨을 만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그는 교황이 되어서 우리에게 그의 가슴을 물들였던 오래된 새로움을 함께 찬미하자고 초대장을 내민 것이다.

간단하게 그를 소개하자면,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출생했고, 어릴 때 온 가족이 독일의 마인츠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하고, 튀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독일 가톨릭학생운동의 지도사제를 맡았고, 베를린대학의 종교철학과 교수로 있었지만, 1939년 독일의 나치에 의해 교직에서 쫓겨나 1945년까지 은거했다. 많은 활동 중에서 전례를 개혁을 통한 교회 개혁의 노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미사에서 사제가 신자들을 마주하고 진행하는 것으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미를 회복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알프스를 바라보는 '사람人' 자 모양의 긴 코모 호수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인 벨라지오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의 길을 걸으며, 두 발을 딛고 걷는 작은 마을이 오랜 시간을 통해서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고유한 모습으로 이어져 오는 것을 기억한다. 이어서, 기계문명과 대량생산으로 더 이상 그 속도가 유지될 수 없고, 그 개별자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문명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부풀려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걱정과 함께 이야기한다.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을 목격하면서 그 실상을 알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전쟁이 아닌, 근대의 문을 닫고 새로운 감각으로 시작하는 현대문명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을 넘어서서 인간을 지배하는 익명의 시스템!

지난 백 년 동안 인류는 “현대”라는 역사의 한 토막을 주도적으로, 혹은 떠밀려서 달리고 있다. 심지어 달리는 것을 넘어서 날아다니고, 대기권을 뚫고 솟구치기도 한다. 사람과 물건을 옮기는 큰 새 같은 비행기들은 높이 날아 그 위엄을 과시했지만, 최근에는 낮게 날아서 인간과 동물의 저항을 받는 드론이란 비행체도 등장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과 성격으로 새롭게 규정되었고, 현대는 바로 이러한 기계문명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삶의 패러다임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문명의 윤리적 측면은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그는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에서 그 파악되지 않는 규모와 성격을 넘어서는 예언적인 통찰을 지속하고 그 결과 미로를 빠져 나가는 길을 가늠해서 알려준다. 문제는 그 발전의 방향인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어디로?

▲ 코모 호수를 따라 있는 벨리지오의 풍경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그의 아홉 번째 편지에서 몇 대목을 소개해보자.

새로운 것에 대해 인간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파괴적으로 작용하고 있네. 이것은 아직 조절되지 않은 열린 힘들이며, 아직도 채취되지도 않았고,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작업하지 않은 원재료일세. (109쪽)

우리의 자리는 되어가고 있는 것에 있네.... 우리는 새롭게 발생되어 나오는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영향을 주는 일을 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네.... 우리의 시대는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삶의 장이자,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할 하나의 과제로 주어져 있네. (111쪽)

우리가 여기서 필요로 하는 것은 좀 더 적은 양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기술이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좀 더 강하고 좀 더 신중하고 좀 더 ‘인간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네.... 경제적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좀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으나, 좀 더 성숙되고 책임있는 의식을 갖고 있어서 개개인을 그가 속하는 전체와의 연관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경제적, 정치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네. 이 모든 것은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가진 자연의 영역에서 올바르게 존재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지.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자신과 관련시켜 나가서 ‘세상’을 다시 건설해 나갈 때 가능한 거네. ( 114쪽)

▲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편지",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98 (사진 제공 = 최우혁)
이러한 모든 것은 참된 의미의 교육과 깊은 연계를 갖고 있는 것이라네. 본질적인 교육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네. ‘고등교육을 받은 교양있는’ 이란 말이 벌써 내적으로 성숙된 사람을 지칭하고 있네 (118쪽).

현재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이 발생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나는 믿고 있네.... 새롭게 발생되어 나오기를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의 깊은 곳에 일치해 들어가는 것이네. 새롭게 발생되어 나오는 문제들을 거슬러 투쟁해 나가는 새로운 지평에 일치해 들어가는 것이네. 이 세계관은 이러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갈 것이네. 이러한 세계관의 심층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려 나올 것이네. (120쪽)

우리가 우리의 깊은 차원과 함께 하느님께 와서, 하느님으로부터, 그 분의 자유와 힘으로부터 이 무질서의 주인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지. 그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앞에서 본격적인 결정을 외로이 지탱해 나가는 사람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도 이 모든 것이 달려있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고 있는 것을, 우리가 느끼고 있는 힘들을 신뢰해야 하네. (126쪽)

우리 인간에게 고유한 힘에 관한 성찰, 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바로 나의 존재와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습을 따라 만들면서 각각의 인간에게 준 그의 삶을 열어나갈 고유한 사명은 바로 우리의 삶을 열어나가는 열쇠일 것이라고 가늠해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열쇠가 제대로 꽂혀서 “예”라고 열리는 소리가 날 때, 이루어야 할 자신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홉 개의 편지들을 읽으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서한은 과르디니의 편지에 대한 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스승이 가르친 길을 따라 부지런히 살아온 성실한 제자가 이 “현대”라는 길을 벗어난 마지막 모퉁이에 서서 다음을 향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우혁 (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립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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