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6화 (열다섯 살 때, 1954)


형은 버스차장 하고

지난해 늦가을, 우리는 원장아버지 집 마당에 지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어. 새집이라 했지만, 강당은 미군이 준 새 목재로 지어 새집 같았으나, 숙소는 헌 자재를 얻어다 지어서 집이 허술했고, 또 구들을 잘못 놓아 무척 추웠어. 언젠가는 방이 너무 추워서, 자고 일어나니까 내 몸이 새우처럼 꼬부라진 적도 있었지. 하지만 피난살이(!)를 접고 당당한 집들이를 한 거지.

이때부터 해마다 겨울방학이 되면, 달구지를 끌고 안동방향의 황전과 하눌 사이에 있는 먼 산까지 나무하러 다녔지. 땔감도 귀했고 겨울바람도 차가웠어.

중학교 진학을 할 때였는데, 형은 중학진학을 포기하겠다고 했어. 형은 학교공부보다 기술공부를 하겠다는 거야. 버스 차장이 없던 시절, 형은 버스차장 겸 조수로 따라나섰어. 그때부터 형은 입에 풀칠만 하는 객지생활을 시작한 거야. 그때는 아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월급 한푼 안주고 다만 먹여주고 입혀줄 뿐이었지.

나중 생각이지만, 형이 중학진학을 포기한 것은, 아마도 ‘불난리’와 관계가 있을른지 모르겠어. 죄(!) 지은 몸으로 중학진학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면목이 없어서였을까?! 무척 쾌할하던 형이, 불난리 후로는 말수도 적어지고 풀이 죽은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쟁고아들은 중학교 월사금(매달 학교에 내던 수업료)이 면제였는데......

장학금 없는 장학생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어. 합격자 발표 날 나는 깜짝 놀랐어. 공부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는데, 전체 4등으로 합격한 거야. 나는 일약 우등생이 되고 장학금 없는 장학생이 된 거라구. 좀 우쭐했지.

원장아버지는, 새로 입학하는 아이들 교과서를 사 주실 돈이 없으셨는지, 큰 성냥곽 몇 개씩 사 주시면서, 지방 유지들 찾아다니며 성냥을 팔아 그 돈으로 교과서를 사라고 하셨고, 우리는 그대로 했지.

아무튼 당시 내 형편으로는 꿈도 못 꾸던 ‘중학생’이 된 거야. 할머니는 나보다 더 좋아하시며, 입고 다니면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 나팔바지 하나를 사 주셨어. 보리풀죽으로 연명하시던 할머니께서......

학교공부는 중1부터 중3까지 내처 우등생이었어. 특히 수학성적이 가장 뛰어났지. 입학성적이 졸업 때까지 가더라구. 시작이 반이니까.

내가 중1 때 원장아버지는, 우리 고아들을 가톨릭신앙으로 키울 작정으로 안동성당 신부님을 찾아가 상담하셨어. 당시 봉화나 영주에는 성당이 없었거든. 그때부터 안동에서 여자 교리교사 한 분이 주일마다 봉화에 와서, 교리도 가르치고 성가도 가르쳤지. 당시 교리책은 320문답으로 되어있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문답내용이 무척 어려운 신학명제(神學命題)들이었어.

지금은 어른, 아이, 노인 따위로 구분하여 따로 만든, 비교적 쉬운 교리서가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어려운 문답교리책을 남녀노소가 다같이 교재로 썼다구. 설명은 교리시간에 조금 듣고, 그냥 외우는 거야. 아무튼 나는 교리문답 외우기에서도 열성을 보였지. 학교 우등생이라서 그랬는지, 새로운 내용이라서 그랬는지, 외로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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