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와 함께 돌아본 가실성당 120년

▲ 1923년에 지어진 가실성당. ⓒ배선영 기자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성당부터 들러 친구들과 놀았다. 저녁을 먹고, 약속이나 한 듯이 친구들은 또 성당으로 모였다.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던지라 성당에 매일 갔고, 자연스럽게 미사도 매일 참석했다.

중고등학교 때도 성당은 늘 함께했다. 시험 기간에는 교리실에서 선배들과 같이 공부를 했다. 방학에는 서울 대신학교에 다니는 학사님이 학교에서 배워 온 노래, 게임, 교리 등을 가르쳐 줬다. 그 학사님이 사제품을 받았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다.

1983년 7월 26일 가실성당에서 나온 세 번째 사제인 이기정 신부가 서품을 받고 본당인 가실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린 날, 아이들이 열을 맞춰 신부를 맞이하고 꽃을 건네던 모습이 생생하다.

“성당이 나를 키웠다.”

1961년에 태어나 그 해부터 성당에 다녔던 이경숙 씨.(히야친타, 54)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가실성당 120년의 역사에서 거의 반을 성당과 함께 한 것이나 다름없다. 가실성당은 대구대교구에서는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 다음으로 오래된 성당이다.

대축일이면 강 건너에 있는 외가 친척들도 배를 타고 성당에 왔다. 친척들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대축일이 다가오면 설렜다.

1895년 가실성당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았다. 당시 강이 경상북도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기 때문이다. 가실에 있던 가실나루터와 강창, 한실에 있던 나루터는 낙동강을 건너 성주군으로 건너갈 수 있었고, 멀리는 부산, 대구, 상주, 안동 등에 오가면서 쌀, 배, 생선, 소금 등을 실어 왔다.

그래서 한때는 공소가 105개나 되었다. 가실성당에 속하다가 본당이 된 곳만 해도 김천 황금동(1901), 용평(1907), 퇴강(1923), 왜관(1928) 4곳이다.

1960년에서 1964년에 가실성당의 주임이었던 송만협 신부(독일인, 성 베네딕도회)의 기록에 따르면 주요교통로가 바뀌면서 가실은 조용한 본당이 됐다. 당시 나루터가 7곳에 있었는데 노는 직접 저어야 했다. 장마 때는 신자들이 성당에 올 수 없어서, 사제가 신자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35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다.

지금은 나루터가 남아 있지 않지만, 이경숙 씨는 1976년에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성주군에 있는 도흥 공소로 소풍을 갔던 일을  추억했다.

성인이 돼서도 이경숙 씨의 생활은 성당과 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담뿍 받은 사랑”을 19년간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다시 나눴다. 그는 “시골본당이라 열악한데도, 래프팅, 스키캠프 등 주일학교에는 혜택을 많이 주려고 한다”며 이런 지원 때문에 교사를 하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던 5년 전까지 가실성당의 주임신부였던 현익현 신부(독일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는 삶의 기쁨을 체험하면 그 기쁨으로 힘을 얻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며 주일학교에 힘을 쏟은 이유를 설명했다.

기도하기 좋고, 고즈넉한 가실 성당

▲ 가실성당 안에 있는 색유리그림. ⓒ배선영 기자
현익현 신부는 1999년부터 2011년에 가실성당의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성당을 새롭게 단장했다. 지금의 성당 건물은 중국의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구운 벽돌로 1923년에 지어졌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여동선 신부(프랑스인)가 벽돌을 하나하나 망치로 두드리며 확인할 만큼 튼튼하게 지었지만, 오래된 만큼 보수가 필요했다. 현 신부는 우선 노인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 성당 바닥에 온돌을 깔았다.

그리고 성당 안의 유리창에는 독일의 에기노 바이너트(Egino Weinert)가 그린 '색유리그림'으로 꾸몄다. 예수의 삶을 차례대로 그린 것이다. 그 외에도 감실, 14처 등에서 예술성을 더했다.

현 신부는 “예술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기 좋은 성당”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어떤 이는 가실성당에 오면 “저절로 기도가 된다”고 말하며,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실성당을 찾는다. 2003년에는 성당과 사제관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에 지정됐다.

가실성당, ‘아름다운 집’으로 돌아와 120주년을 맞다.

가실성당은 1950년대 초반부터 그 이름이 낙산성당으로 바뀌었다.

“10년 전까지 본당의 이름은 가실이었다. 낙산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인공적인 이름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 (송만협 신부의 자서전 중에서, 1961)

▲ 가실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예전 교리 자료. ⓒ배선영 기자
신자들은 낙산에서 원래 이름인 가실이란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 투표를 했다. 현익현 신부의 생각이었다. 성당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조심스러웠지만, 낙산이란 지명은 1914년 일제시대에 바뀐 것이었고, 가실은 세상에 하나뿐인 예쁜 이름이다. 2005년 낙산은 다시 성당의 모습과 꼭 어울리는 ‘가실’이란 이름으로 돌아왔다.

2015년 6월 14일 가실성당 12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200여 명이 모여 축하하고 추억을 되새겼다. 한편으로는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젊은이와 아이들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했다. 1960년대 1500여 명에 이르렀던 신자수는 1970년대부터 점점 줄어 지금은 500여 명이며 주일학교는 초중고를 다 합해 20여명이다.

이경숙 씨는 “자신은 학교를 마치고 성당에 왔는데, 요즘 아이들은 학원에 시달린다”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비교해 주일학교에 아이들이 적다며 안타까워했다.

지금 가실성당의 주임인 황동환 신부는 이렇게 작아지는 성당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칠곡군와 연계해 가실성당을 시민들도 찾는 공간으로 정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자들의 힘만으로는 본당을 꾸려가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1985년의 처음 가실 성당은 한옥 성당이었는데, 원래 자리에 이 한옥도 복원하고, 120년 역사가 담긴 미사 도구, 교리 자료, 사제복 등을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할 예정이다.

황 신부는 가실성당은 “24시간 열려 있다”며 언제든지 지나다가 찾아 달라고 말했다. 이경숙 씨의 바람대로 가실성당은 150년, 200년을 준비하고 있으며, 애정과 관심을 가져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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