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당신의 기쁨 안에 잠겨]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봄이 되면, 꽃향기가 거리에 묻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녁 산책을 할 때면 가만 서서 꽃향기를 맡거나, 또 어디서 향기가 나는지 향기를 따라가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짙은 향기를 뿜는 꽃은 장미나 백합이 아니라 이름도 모를 아주 작은 꽃들이다. 담장에 몸을 기댄 채 아주 자연스럽게 펴서 고맙게도 향기를 나누어 준다. 아무런 이름이나 영광을 누림 없이 사소하고 자연스럽게. 그럴 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 담긴 향기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성 금요일 장엄 전례를 통해, “보라, 십자나무,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달렸도다.”라는 아름다운 말씀을 들었다. 나는 사순절이면 루오의 ‘미제레레’라는 판화로 사순절에 십자가의 길 하는 걸 좋아했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판화로, “향나무는 자신을 찍어내는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면, 그 분의 향기가 내 안에서 뚝뚝 묻어 나와서 주변을 향기롭게 해 주어야 할 텐데…. 내 안의 향기가 이름도 없이, 자취도 없이, 그렇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 루오의 미제레레(Miserere) 연작 20번째 판화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의 제자로 사는 이 길 위에서 우리가 풍겨야 하는 향기는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으로 선출 되시고 처음 발표하신 교황권고가 <복음의 기쁨>인 것도 우연은 아니지 싶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만 너무 초점을 맞춘 나머지 기쁨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분노에 너무 길들어진 나머지, 기쁨에는 너무 서툴다고나 할까?

무언가를 해보려고 너무 골몰하다보면, 현실의 무게에 압도되어 숨도 쉴 수 없는 부담감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 한가운데서 부활의 새 생명을 보듯이,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의 결을 느껴야 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난 전에 마지막으로 “너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리라.”(16:20)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결국 세상에 슬플 일이 없어진다거나 완벽한 세상이 되어서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만나기에 기쁨이 되는 것 같다.

고마운 분이 보내준 “잊지 않을께요.”라는 알록달록하게 물들인 나무에 적힌 예쁜 필체, 그리고 노란 묵주는 마치 노란 손수건처럼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묵주알을 굴릴 때 마다 슬픔 속에서도 함께 하는 따스함이 묻어났다. 그 은은한 향기가 나로 하여금 그곳,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아파하고 위로하는 곳, 그 기쁨의 자리로 다가오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의 횡포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채 서성일 때, 조그맣고 따스한 사람의 향기는 거대한 힘으로 위협함 없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기쁨과 희망으로 이끄는 것 같다. 박사과정 중에, 나는 홍콩에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아시아 해방신학자들을 만나고 함께 공부하는 특권을 누린 적이 있다. 그때 서광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어느 신학자 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늘 기억에 남는다. 아시겠지만, 살벌한 유신정권 시절에 우리 해방신학자들은 신앙 때문에(신학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다.

아시아해방신학은 고통, 가난, 그리고 억압이 주제였다. 필리핀, 인도, 홍콩, 일본, 한국에서 온 신학자들이 모두 답이 없어 보이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며 심각해졌단다. 그러자 갑자기 필리핀에서 온 여성신학자가 “우리 좀 쉬자”며 음악을 틀었다. 그 여성 신학자는 함께 춤을 추자고 권했다고 했다. 물론 함께 춤을 춘 사람들도 있었고, 추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휴식이 끝나고 다시 제 자리에 돌아와 앉자, 그 여성신학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너는 구원 받았고, 너도 구원 받았고, 너는 구원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네가 어떻게 그걸 아냐고 묻자 “너는 춤추었고, 너도 춤추었고, 너는 춤 안 추었잖아!”라고 말하더라면서, 선생님은 껄껄 웃으셨다.

기쁨이 없다면,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했다 해도 거기에 구원은 없다. 우울한 성인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왜 그럴까?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는 절망감을 넘어서 내가 거저 받은 하늘나라를 그저 나누는 마음을 갖는다면, 매순간 우리는 내면에서 빛나는 하늘나라를 느끼면서 기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난에 지쳐도, 사회의 불의 때문에 울화병이 도져도, 또 내가 이렇다 할 멋진 행동을 못하더라도, 내 영혼이 기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십자나무 위에 달린 그 구원은 우리를 절망 속에서 희망하게 하고, 좌절 속에서 일어나게 하니까. 그래서 우리의 혼은 기죽지 않기에, 우리는 기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이기심과 욕망 너머로, 작은 걸음이나마 떼게 하는 향기가 나를 부축하여 움직이게 하니, 기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저 아픈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면, 담장에 핀 이름 없는 작은 꽃처럼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건 아닐까? 그런 내 작은 기쁨이 내 맘속에서 샘이 되고, 또 누군가의 마음에 기쁨의 꽃으로 피어나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싶다.

박정은 수녀 / 홀리네임즈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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