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당신의 기쁨 안에 잠겨]

시인 T. S. 엘리어트가 말했던 ‘잔인한 달’ 4월이 돌아왔습니다. 이 시인의 표현 때문에 이 달에 태어난 이들이 언짢아 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탄생이란 것이 사투를 겪고서 얻게 되는 기쁨이니 아예 그른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져보면 피어나는 꽃들도 애초에 씨앗에서 출발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듯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요한 12,24) 성장과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니 생명은 결국 일정한 ‘잔인함’을 겪은 후에 받게 되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잔인함을 딛고 얻었기에 소중하고 복되디 복된 생명을 기념하는 행위가, 작년 4월부터 이 땅 한국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4월은 너무도 잔인함만 남아버린 달이 되었습니다. 그래요, 부활이 며칠 남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허망하게도 무고한 사람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 모르고 서늘한 가슴으로 너무나 경황없이 지나쳐버린 부활절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 광화문 세월호 천막 주변에 걸린 현수막 그림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모두 살려낼 수 있었다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여전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분노보다 황당함이 더 크게 밀려왔고, 말도 안 되는 희생을 보며 날마다 우울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우울함의 바다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떨치지 못할 깊은 슬픔을 무시해보고 싶어 일에 몰두하려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요. 방안에만 있다가는 그 깊은 우울감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아 뛰쳐나온 이들과 세월호의 유족들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인연치고는 너무나 슬프고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만나 확인했던 것이 그냥 잔혹함 만이었을까요? 우리가 처절한 슬픔에서 고개를 들어 서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이란, 마음 안에 자기 자신을 이웃과 나누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알기에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이 그렇게 모여들었고, 부조리와 헛된 욕망이 빚어놓은 악을 거부한다는 목소리와 몸짓을 보여줬습니다. 오묘하게도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새로운 가족들이 생긴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왁자지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잔치 분위기라고 하겠습니다. 흉흉하고 무거운 초상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운 말입니다.

잔치 분위기는 매우 복음적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다는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울려 노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는 묘한 결론에 이릅니다. 어울려 노는 것은 자신을 누군가와 나누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이미지가 잔치(마태 22,9; 25,10; 루카 15,24 등)로 그려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았던 현실에서도 만나면 반가운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금요일엔” 돌아오겠다던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당장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들과 재회할 때까지 외롭고 슬픈 길을 함께 걸어줄 이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잔치를 준비합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실의에 빠진 이들이 각자의 방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거리로 나와, 함께 부활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더 일찍 어둠을 몰아내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게 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우울한 마음을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해 두면 놀랍게도 기운이 납니다. 마치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자 스며든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부활이 우리 마음 속으로 흘러드는 것을 봅니다. 이 위대한 힘을 믿고 다시 웃으려 합니다. 부활을 준비하던 그 때에 비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비극을 넘어 우리를 부활시키는 힘이 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부활은 불의한 세상을 가볍게 날려버린 카운터 펀치였습니다. 비록 원치는 않았지만 오늘 이 땅에서 예언자가 되어버린 신앙인들은 부활이 지닌 그와 같은 미덕을 마음에 담고 지금 울고 있는 이들과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끈 쥔 두 손이 아니라 가벼운 미소입니다. 잔치를 생각해 보세요. 봄이 오듯 기쁨이 밀려옵니다.

박종인 신부 /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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