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 이슬람의 변화와 우리

1. 들어가며
올해 세계는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으로 시작했다. 1월 7일 오전 11시 30분경, 쿠아치 형제는 자동화기로 50여 발을 쏘고, “알라 후 아크라(신은 크시다)”고 외쳤다. 경찰관 2명을 포함하여 11명이 사망했다. 그들이 알카에다 예멘 지부 소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1월 9일 프랑스 경찰 특공대가 두 명을 사살했다.

사흘 만에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세계가 들끓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필자의 마음에는 ‘이슬람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과정’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느낌이 왔다. 그리고 서너 가지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마침 공동선에서 그 생각을 서술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린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밝힐 것이 있다. 필자는 이슬람 전공자가 아니다. 구약학과 고대근동학을 공부한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다.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터키 등이 ‘헬레니즘화 - 그리스도교화 - 이슬람화’되기 이전의 문명과 언어를 공부했다. 이렇게 ‘공부하는 지역이 겹치는’ 인연으로, 나름대로 꾸준히 이 지역에 대해 읽고,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이따금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10년이 넘는 ‘관찰자의 시선’쯤으로 보아 주시면 좋겠다. 논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두런두런 이야기하듯이 적어 보려고 한다. 당연히 반론과 토론을 환영한다.

2. 도식과 눈치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 이후, 솔직히 말하면 국내의 논쟁은 재미가 없었다. 거칠게 표현해도 된다면, 좌파는 도식적이었고 우파는 눈과 의지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일부 좌파 논객은 식민지 담론에 머물러 있었다. ‘유럽은 제국주의, 이슬람은 피지배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식민지를 경험한 민족으로서 이슬람의 울분에 공감하고, ‘윤봉길, 신채호, 김구 모두 무장론자였다’는 식의 옹호론이 나왔다.

필자는 이런 비교가 정교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윤봉길, 안중근 등을 쿠아치 형제와 비교할 수 없다. 첫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왕족이나 최고 권력자를 직접 겨누었다. 3류 풍자 잡지를 급습하고 만세를 외치지도, 도주하지도 않았다. 둘째, 쿠아치는 ‘동양평화론’ 등을 작성할 수준이 아니었다. 김구 등은 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상당한 비전과 철학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런 도식적 견해를 ‘투사’(projection)라고 느꼈다. 투사는 실재를 왜곡하는 안일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필자가 과문한지 몰라도, 우파 쪽에는 읽을 만한 글 자체가 없어 보였다. 가능한 많은 정보를 빨리 모아서 주판알을 튕기는 인상도 일부 받았다. 괜찮은 하드웨어를 갖춰 놓고도 공격적으로 사용할 패기가 없는 기술자 같았다. 의지 없는 눈치. 미안하지만 그렇게 보였다.

▲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이슬람교인들.(사진 출처 = pixabay.com)


3. 이슬람을 주어로 말하기
한국에서 읽은 글의 대부분은 이슬람을 주어로 말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샤를리 에브도를 주어로 문장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테러리스트를 주어로 문장을 짓기도 쉽다. 대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샤를리 에브도는 풍자가 지나쳤다.’ 등
‘테러리스트의 폭력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등

두 문장을 이어 복문을 만들기도 어렵지 않다. 대개 논쟁은 아래의 두 입장으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는 지나쳤지만, 테러리스트의 방법은 절대 허용될 수 없다.’
‘테러리스트의 폭력은 허용될 수 없지만,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는 분명 지나친 것이었다.’

국내의 논쟁은 이 두 복문의 조건절과 주절의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줄세우는 듯 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두 문장은 거의 동어반복이고 지루했다. 주어를 그리스도교로 해 봐도 서술어는 어렵지 않다. 한국인으로 해 봐도 쉽다.

그런데 이슬람을 주어로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 앞에서 ‘이슬람은.... 독자는 어떤 문장을 지으실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서술어를 택해야 할까?

이슬람을 주어로 말한 글은 소설가 장정일이 유일한 것 같다. 그는 한겨레신문 2월 4일자 “‘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에 대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반가운 견해다.

결코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 ... 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들이 길러 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앞으로는 이슬람을 주어로 말해야 할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독서와 토론이 늘지 않는다면, ‘도식파’와 ‘눈치파’의 글만 늘어갈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이슬람 세계의 상황과 실체를 정확히 보고 우리의 눈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생각이다.

4. 범이슬람주의의 종말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교수는 다양한 인터뷰 등을 통해 이슬람 세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범이슬람주의는 사라졌다. 이슬람교인들은 개별 국가와 부족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경쟁한다.’ 필자는 이 관찰에 찬성한다.

범이슬람주의는 없다. 전체 이슬람 세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카에다, 탈레반, “이슬람국가”(IS), 보코하람 등 과격파 원리주의 단체가 ‘이슬람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슬람교인을 대표하기는커녕, 이슬람 세계의 골칫덩이다.

필자의 눈을 끈 문장이 있었다. 올해 2월 3일,“이슬람국가”(IS)는 요르단 조종사 모아즈 알-카사스베를 화형하는 끔찍한 필름을 전 세계에 보냈다.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는 즉시 보복했다. 그 때, 요르단군은 전투기에 실을 폭탄에 이런 구호를 썼다. “너희들은 이슬람이 아니다.”

그렇다. 범이슬람주의는 없다. 이슬람교인이 이슬람교인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 서로 옳은 신앙(orthodox)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이런 갈등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넘나든다. 시리아 반군과 시아파 이슬람국가인 이란이 “이슬람국가”(IS)를 상대로 작전을 벌이고 있다. 이 세 당사자는 모두 이슬람국가들이다. “이슬람국가”(IS)를 무찌르는 작전에 가장 원리주의적인 사우디와 가장 세속화된 터키가 협조한다. 흥미롭게도 암암리에 미국과 이스라엘도 참여하고 있다. 각자의 생존을 향해 무한경쟁하는 가운데 비이슬람 국가와도 협력하고 교류하는 상황은 어쩌면 지구촌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다.

▲ 할랄 식품이 판매되는 식료품점이 영국 런던 거리에 보인다. 할랄 식품은 이슬람 음식 규정을 따른 식품이다. (사진 출처 = www.geograph.org.uk)


5. 이슬람교인의 경쟁
사실 이슬람교인의 경쟁은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음식 규정인 할랄(Halal)을 예로 들어 보자. 그 기원은 구약성경의 율법인데, 현재 유대인들은 코셰르(Kosher)라고 한다. 코셰르와 할랄의 기본적 개념은 같다. 거룩한 백성은 온전한 것만을 합당한 방식으로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본 개념뿐 아니라 내용도 엇비슷하다. 쇠고기를 생산하는 경우, 대개 이런 내용이 포함된다. 송아지부터 합당한 환경에서 적절히 길러야 하고, 너무 어린 것을 잡아서도 안되고, 죽일 때는 고통을 최소화해야 하며, 피를 온전히 빼고 고기만을 취하고, 신에게 바치는 의례를 행하고, 내장 등 어떤 곳에서도 기형이 발견되면 안 되고, 가장 위생적으로 처리하고, 유통과정에서도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점 등이다.

할랄은 종교 규정이기도 하지만, 각국의 큰 산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큰 무역 장벽으로 기능한다. 한국의 식품이 이슬람 세계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할랄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슬람 각국은 기후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른 할랄 규정을 갖고 있다. 이를 통합하여 국제 할랄 표준을 만들자는 기구가 있는데 The International Halal Integrity Alliance, 줄여서 IHI Alliance라고 한다. 만일 국제 할랄 표준이 정해지면, 그 경제적 효과는 막대하다. 이슬람 인구는 13억이나 되지 않는가. 현재 이슬람 각국은 자국의 전통과 산업에 유리하게 이 기준을 이끌려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 등 비이슬람 국가들까지 외교전에 참여한다. 막대한 이익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랄 규정을 둘러싸고 정작 ‘종교’나 ‘믿음’은 부차적이 된 듯한 느낌이다. 이슬람 국가들의 무한 경쟁이다. 이 점이 나누고 싶은 둘째 생각이다.

6. 경전은 편집되었는가
이렇게 현대 세계에서 종교는 세속을 이끌기보다 세속에 끌려다닌다.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 보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이슬람 신학은 아직 한참 뒤쳐진 듯 하다. 이런 현상은 큰 도전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선 경전만 놓고 보자.

유일신 종교에서 경전은 큰 권위를 지닌다. 유일한 신이 역사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하는데, ‘드러내다’(reveal)는 의미다. 그런데 그 계시는 말을 통해 주어졌고 책에 쓰여 있다. 그러므로 그 책은 거룩한 책, 곧 ‘성서’(聖書, Holy Scripture)다. 성서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말씀이므로, 한 글자 한 글자에 하느님의 숨결이 들어 있다. 누구라도 한 획도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이나, 유다교의 토라나, 이슬람의 쿠란이나, 거룩한 책이요 절대적인 책이다.

하지만 현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주류 신학은 성서가 인간 역사에서 수없이 편집된 사실을 인정한다. 20세기에 교황청에서 나온 성서 해석에 대한 문헌들은 이런 편집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런 긍정은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성서 본문에 제한되던 눈을 더 크게 키운 것이다. 성서 본문의 모든 글자에 하느님의 숨결이 붙박혀 있지만, 수천 년에 걸친 성서 본문의 발생과 전승과 해석 단계에서 하느님께서 다양하고 풍부한 방법으로 비범하게 일하셨음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더 큰 시각의 신학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신학과 상생한다.

성서가 편집되었다는 신학은 배타적 신학을 물리치는 데 큰 효과를 냈다. 성서의 편집과 전승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추론이 가능해졌다. 성서의 일부 구절을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일도 가능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성찰하고 해석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배경에서 도발적 질문도 이어졌다. 그리스도교의 시작은 예수일까 바오로일까. 유배 이전의 이스라엘인은 메시아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신학 수업 시간에 상상력과 토론을 자극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내부에도 근본주의가 존재한다. 그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를 배타적으로 해석한다. 성서가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개신교 일각에서 제기하는 ‘축자영감설’, 곧 성경 한 자 한 자에 하느님의 영이 농축되어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성경의 한 획도 손을 댈 수 없고, 모든 낱말과 구절은 현재의 그 자리에 그 맥락에서만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전제에서는 다채로운 신학이 피어나기 힘들다. 철학과 문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도 성서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신학이 자리 잡는다.

현재 이슬람의 쿠란 연구는 대개 이런 경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 이슬람권의 분위기에서, 쿠란이 편집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쿠란의 모든 구절은 본래의 그 문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도발적 질문이나 본래의 문맥에서 벗어난 해석은 금지된다. 배타적 신학이 자리 잡기 좋은 조건이다.

7. 이슬람 신학의 발전
그러나 필자는 이슬람 신학의 발전에 퍽 긍정적이다. 역사를 길게 봤을 때, 이슬람 문명은 새로운 신학을 펼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새로운 이슬람 신학 창출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겠다.

첫째는 국가별 자유 경쟁의 분위기다. 이슬람 국가들은 더 이상 이슬람이라는 큰 세계의 하위 시스템이 아니라, 국가별로 고유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무한 경쟁하는 주체다. 이는 국가별로 종교적 권위의 형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가나 언어와 민족에 따라 새로운 신학적 사고가 형성되기 좋은 조건인 것이다.

둘째는 테러리스트들이 명분에 시급히 대응할 필요다. 사실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주장은 정말 형편없다. 테러에 참여해서 목숨을 잃으면 내세에 70명의 부인이 생길 것이라는 둥, 모든 여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는 둥, 중세적 칼리프 국가를 설립한다는 둥, 여성 전쟁 포로를 성적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둥의 논리는 조악하고 저열하다. 그들은 세계 종교이자 인류의 문화적 자산인 이슬람의 정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런 근본주의에 대응하는 신학적 노력은 이슬람 내부에서 이미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부족에 따라 형편이 다르다. 전선을 맞대고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조금 느긋하게 바라보는 쪽도 있다. 세속화된 지구촌 세계를 수용하여, 이슬람 세계의 개혁으로 연결시키려는 쪽이 있는가 하면, 전통을 더 강화시키는 쪽에서 문제를 이해하는 쪽도 있다. 유럽과 북미의 대학에 설치된 이슬람 학과에서도 점차 한 마디씩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른바 ‘서양 이슬람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속에서 불가피하게 종교의 자유, 타종교와의 대화, 세속화, 여성, 인권, 발전, 평등, 세계화 등의 낱말이 성찰되고 토론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견해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학적 개혁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종교나 종교적 격변은 피를 크게 불렀다. 필자는 이슬람 세계 내부의 격동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유럽의 예를 들자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독일은 30년 전쟁을 치렀다. 한 지역의 한 세대를 온전히 전쟁에 투입하고서야 일단락되는 일이었다. 그 결과는 유럽의 국민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그런 역사가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날 듯한 느낌이다. 우리는 긴 변화의 초입에 사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누고 싶었던 셋째 생각이다.

8. 나가며: 이슬람의 존중
지금까지 간략하게 서술한 내용은 인문학적으로 거시적 안목을 요구한다. 13억의 문명권이 변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슬람은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자체적으로 대응할 충분한 역량을 축적한 문명이다. 물론 고통과 인내가 요구될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우리에게는 무엇이 요구될까? 필자는 우리에게도 인내와 꾸준한 공부가 요구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눈으로 관찰하고, 우리의 감으로 맥을 짚어서, 우리의 언어로 요약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13억의 현상’을 관조할 실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다수의 종교가 큰 탈 없이 살아온 땅이라고 자랑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참조사항이 될 수 없다. 서술어를 스스로 짓고, 문장을 쌓아 올려 참조할 수 있는 본문, 영감을 주는 대화를 작성해야 한다. 낡은 도식에 따르거나 남의 눈을 빌리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 서술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글은 <공동선> 3ㆍ4 월호과 공동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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