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복음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는 박정은 소피아 수녀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했던 에세이들을 모아서 <부서진 것의 아름다움>(마리아네스트 에쎔북스, 2014)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박정은 수녀는 미국에서 ‘Circle of Woman’(여성의 원)이라는 피정을 지도하며 많은 여성들이 생활 안에서 열린 삶을 살도록 돕고 있다. 그동안 아시아 종교전통의 ‘몸수행’에도 관심을 지니고 있는 박 수녀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을 나누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가난함 속에서 찬란하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

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높은 봉우리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세상은 조그맣게 보이고, 그래서 마음은 넉넉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넉넉하고 높은 마음은 못 되더라고요. 세상 한 가운데서 만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보는 세상이 더 좋아요. 뭐 내 놓으라 할 것 도 없고, 뭐 특별히 잘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일상의 갈피를 바로 잡고, 또 삶의 의미를 찾아서 하루하루 분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들 속에서 산다는 것이 무언지를 배웁니다.

몇 년 전 일이었어요. 어느 이른 아침 산책을 나섰는데, 흑인 거지 할아버지가 “굿모닝!” 하는 거예요. 갑자기 좀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어쩔까 하다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데, 그 할아버지가, “햇살이 너무 아름다워서 당신한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라고 정답게 말을 건네더군요. 그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좋은 하루 되라고 축복을 나누고 싶었던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 이른 아침, 거리에서 그 거지 할아버지는 우리는 서로의 축복이 필요한 작은 존재들임을 제게 가르쳐 주셨던 것 같아요.

길을 걸으면, 거리에 서있는 가로수들의 표정을 보게 되고, 바람소리를 듣게 되고, 계절이 지나고 또 돌아옴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서에 보면, “길 위에서” 생긴 이야기가 많이 있지요.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던 하혈병 앓던 여인도 길 위에서 치유를 경험했고, 예수의 죽음이 슬펐던 두 제자가 부활의 의미를 깨우친 곳도 길 위였지요. 이처럼 길 에서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은 제게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찬란하고, 또 아름답습니다.

부서진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말은?

도자로 살면서 예수, 그분을 깊이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복음을 묵상했지요. 그런데, 제가 복음 속에서 만난 그분에게서 맡은 것은 ‘사람냄새’였어요. 하늘이 땅이 되신 신비는, 결국 부서지고 무너진 자의 탄식이 깊이 배어 있었지요. 수도생활 내내 제가 하고 있는 수련은 결국 부서진 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작업인 셈인데, 부서진 틈새로 슬쩍슬쩍 하늘나라의 심연이 보이고, 그 틈새로 걸어들어가면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가지는 참된 아름다움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시애틀 대학에서 영성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인데요. 수업 중에 자신의 영적 여정을 상징하는 것들애 대해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죠. 한 친구가, 자신의 부서진 삶을 담담하게 나누었습니다. 다리를 많이 절던 그 친구는, 자신이 동성애자이고, 자신의 성 정체성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와 집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파트너 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면서, 자신이 가져온 부서진 꽃병 조각을 얼기설기 맞추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부서지고 어그러진 꽃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교실의 불을 끄고 그 꽃병 한가운데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자, 어둡던 교실은 부서진 틈새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으로 인해 환해졌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빛은 우리의 부서짐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저는 점점 상처받은 사람들, 부서진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찾고 또 보기 시작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처는 사람마다 그 고유의 향기와 무늬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또 많이 가지지 못했어도, 있는 그대로 삶의 무늬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아름다움 앞에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아픔 속에 흐르는 눈물은 영혼을 씻어주고, 또 남을 보듬는 힘을 주며, 단단한 나의 자아를 부드럽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부서진 것은 아름답고, 그 부서짐 속으로 걸어가는 우리의 걸음은 참 사람이 되기 위해 내딛는 내면의 행진입니다.

‘완전한 것을 봉헌하려는 마음을 잊으라’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는데... 

그건 자유로움에 관한 묵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자유롭다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는 저마다 다르고, 때론 진정한 자유가 아닌데도 자유롭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까, 생각해 보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많은 재능을 가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죠.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길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그건 나의 좋은 점 뿐 아니라 부족한 점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거죠.

병아리들 틈에 사는 아기 독수리 이야기가 있어요. 자신이 독수리인줄 모르고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한 없이 부러워하면서 바라보기만 하며, 자기 안에 담긴 커다란 능력을 아예 보려하지도 않고 병아리가 되어버린 아기 독수리의 이야기요. 제가 보기에, 높은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독수리 같은 친구에게 왜 하늘을 날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병아리인데 혹시 독수리로 착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도 엉뚱한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병아리라도, 하늘을 한 번 날면 안 되나, 하는 거죠. 꼭 독수리만 하늘을 날아야 하나요? 왜 병아리나 오리는 하늘을 날면 안 되나요? 하늘을 나는 병아리나 고양이를 본다면, 정말 신나고 재미있을 거란 상상을 했습니다. 병아리는 높이 날지도 못할 거고, 또 병아리는 멀리 날지도 못하겠지만, 높이 날지 못해도 멀리 날지 못해도, 나에 대한 의혹의 빗장을 넘기며 한번 날아 보면 어떨까요?

병아리가 날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한 번도 안 날아본 병아리보다는 날다가 떨어져 본 병아리가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떨어질 때의 느낌과 고통은 결국 병아리의 삶의 결을 풍성하게 하는 것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하늘을 나는 것 보다는 그저 닭의 사는 모습이 정겹게 보이거든 당당한 걸음으로 마당을 걸으며, 목청껏 밝아오는 새벽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마음으로 닭의 삶을 살 때, 그 또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본연의 나로서 편안함을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앞에 나의 존재를 찾고,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는, 그리고 넘어지기도, 상처가 나기도 하는 그런 삶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배우기 시작할 것 같아요.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 성가(Anthem)의 가사처럼요.

Ring the bells that still can ring.
Forget your perfect offering.
There is a crack, a crack in everything.
Thant’s how the light gets in
That’s how the light gets in

아직 소리 낼 수 있는 종들을 울려라
완전한 것을 봉헌하려는 마음을 잊어버려라
흠집이 있어, 모든 것에는
그렇게 빛이 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빛이 들어오는 거야.


‘이름 없는 제자로 사는 행복’이라는 글도 있던데,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 다른 거 같아요. 참된 성공은 무엇?

현대 사회에서 간주하는 성공이란 것이 결국 많은 돈을 버는 것, 그래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는

▲ <부서진 것의 아름다움>, 박정은, 마리아네스트, 에쎔북스, 2014

편협한 가치 속에 너무 함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높은 자리로 승진을 하고, 훌륭한 자녀를 두었어도, 희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그리움 같은, 그 사람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을 담보로 얻어내는 성공에는 어쩐지 서글픔이 느껴집니다. 또 그런 명예나, 지위, 경제적 안정을 추구해서 성공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이 성공이 한 인간에게 행복감을 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런 뜻에서 성공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행복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재미있게도, 복음서에서는 베드로나 야고보같은 유명한 제자들을 그다지 성공한 제자로 간주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이름 없는 무명의 제자들의 특권 같은 것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서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랑받던 제자”로 불리는 제자를 이상적인, 그러니까 성공한 예수님의 제자로 이야기 하죠. 그분은 예수님이 죽음을 지켜보았고, 마지막 만찬에서는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예수를 배반할 제자가 누구일까 물을 정도로 스승과 친교를 누린 제자입니다.

샌드라 슈나이더스 수녀님 같은 분은 여성들에게 일상의 중심인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신학적 담론을 나누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는 바로 선교를 시작하는 이른바 준비된, 혹은 성공한 제자로 이름 없는 사마리아의 여인을 지목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성공이란 유명해 지닌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친교를 누리는 것이 되겠죠. 이처럼 참된 성공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감이 늘 동반해야 하겠죠.
 

<뜻밖의 소식>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뜻밖의 소식’이란 제목이 너무 좋았어요. 복음은 사실 뜻밖의 소식인 것 같아요.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암시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제겐 기쁨 같아요. 생각하지도 못했던 소식을 받았을 때의 말할 수 없는 기쁨 말이에요. 때로 우리는 너무 심각해서, 하늘나라의 기쁨, 그 작고 소박한 기쁨을 잃어버리는 때도 있죠. 그 기쁨은 우리가 추구하는 하늘나라가 결국 이 땅에 임하리라는 희망에서 오는 것이고, 그 희망은 우리를 어떤 여건 속에서도 기죽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님이 사제직을 떠나면서 “성령 안에서 내 영혼은 기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걸 기억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에게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소망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우리 안에 더 많이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주제넘게 한마디 덧붙이면, 이건 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도 되겠는데, “행동 속에 관상 (contemplation in action)”을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정직하자고, 그리고 영적 허영을 경계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너무나 많은 지식과 이론에 속지 말고, 깨끗한 맘으로 함께 걸어가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오늘도 추운 거리에서 사랑의 성찬제를 올리시는 형제자매님들께, 그리고 일상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시는 이름 모를 많은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상봉 기자/ 뜻밖의 소식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