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왕소(장혁 분)와 신율(오연서 분).(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별다른 논평은 없지만 방영 초부터 꾸준히 ‘시청률’ 면에서 인기를 끄는 드라마가 있다. MBC 월화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현고운 작가의 두 권짜리 장편소설을 극화한 작품이다. 로맨스 작가인 현고운의 작품 중 역사물은 처음이라, 오랜 팬들 입장에서는 반응이 엇갈리기도 했다. 현 작가의 이름만으로 소설을 사는 독자들 중에서는 심지어 ‘어색한 옷’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드라마 제작진 입장에서는 탐낼 만한 구조다.

어차피 TV 드라마로서의 사극은 한계가 뚜렷하다. 제한된 시간 안에 ‘반드시’ 분량만큼을 찍어 편집하고 방송해야 하는 데다,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을 지경인 살인적 스케줄과 매주 2시간이 넘는 방송시간은 이미 어느 정도는 질적 완성도를 접고 들어가게 한다. 이 때문에 사전 제작 등의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기대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자 지금은 거의 폐기되다시피 됐다.

첫 방영 이전에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다면 그나마 사극을 사극답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증이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고 시청률이 담보되지는 않기에, 대부분의 사극들은 어느 결에 시대불명의 연속 패턴에 빠져 버렸다. ‘팩션’이라는, 약간의 역사적 ‘사실’에 대부분의 상상력과 가공을 섞은 판타지 같은 장르가 인기를 끌면서 더욱 심해진 현상이기도 하다. 사극을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거리낌 없이 국적불명 시대불명의 작품을 만들어도 되는 합리화의 이유를 안겨 준 셈이기도 하다. 현대인 캐릭터의 등장인물들이 현대 한국어를 사용해도 ‘역사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오히려 시청자 입장에서는 등장인물들을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옷’만 요즘 옷이 아닐 뿐인데, 그마저 실은 고증의 산물이 아니라 ‘창작물’이다.

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영화라면 역사적 사실은 물론 소품 하나까지 까다롭게 고증해야 한다. 관객이 돈을 내고 극장을 찾는 수고까지 하면서 ‘고른’ 것이기 때문에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사극에 대해서는 시청자들은 큰 기대는 안한다.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 계속 보게 하는 잔재미들을 주면 된다. 소설은 치밀하게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허술하게 지어내면 독자가 대번에 실망할 수 있다. 소설의 독자들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적 배경에 대한 꼼꼼한 설정과 묘사에 기대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그런 의미에서, 로맨스를 좋아하는 TV 시청자에게 매력적인 원작 소설을 가진 각색 드라마가 됐다. 고려 광종(光宗)의 이야기라는 약간의 ‘사실’만을 따왔을 뿐, 순정만화와 로맨스 소설의 팬들에게 익숙한 방식과 그럼에도 설레게 하는 로맨스의 틀을 잘 살려냈다. 권인찬, 김선미 작가가 아마도 드라마에 어울리게 각색을 잘 해낸 결과라는 중평도 있다.

내용은 고려 초 광종(왕소)의 이야기다. 광종에게 부인이 두 명 있으며, 두 명의 부인과의 혼인 모두 족내혼(대목황후는 이복 누이, 경화궁 부인은 조카)이었다. 광종과 대목황후에게는 혼인 뒤 십여 년이나 지나 얻은 아들(경종)이 있었다. 작가는 이 점에 착안하여 광종에게 좋아하는 여인이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펼쳤다. 따라서 여자 주인공은 가공의 인물 신율인데, 버려진 발해의 공주라는 대단히 순정 만화적인 출생의 비밀이 따라붙었다. 숱한 이야기가 샘솟을 거의 마법의 코드인 ‘남장 여자’까지 겸해, 신율은 ‘개봉이’라는 남성의 역할도 해 낸다. 왕소와는 중원 땅에서 얼굴도 가린 채 그녀는 그의 얼굴을 알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하룻밤 혼인’으로 ‘첫 아내’가 되는가 하면, 고려로 돌아와서는 남장으로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로맨스에 흔하면서도 늘 애절하고 통절한 이야기 구조다.

▲ 황보여원 역의 이하늬.(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저주받은 황자’ 왕소 역할을 장혁이, 오연서가 신율-개봉이를 맡아 열연 중이다. 훗날 대목황후가 되는 (고려 최고 미인)이라는 황주가의 황보여원 공주는 이하늬가 맡아 셋의 극단적인 삼각관계가 주축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맺어진 첫 결혼의 ‘진짜 사랑’과 황제가 명한 ‘국혼’의 아내. 빼어난 미모와 재주를 겨루고 뽐내는 두 여인 사이에서, 황제의 꿈을 남몰래 키우고 단련시키는 한 남자의 성장과 성숙의 이야기다.

배경은 왕족이면 누구나 황제가 되려는 권력 암투와 죽고 죽이는 정쟁이 늘상 벌어지는 ‘개국 초’ 상황이다. 인물과 사건의 구도, 무엇보다 그들의 욕망이 분명하다. 누구 하나가 밀려나거나 죽어야 하는 구도다. 그들 모두의 됨됨이와 ‘왕이 되려는 이유’ 또한 양보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드라마는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매력적이면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를 끌어당긴다. 대놓고 순정만화적인 대사들도 오히려 재미의 요소가 되며 입에 착 붙는 느낌을 준다. 터무니없고 ‘순정’하기 이를 데 없는 순애보(들)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이 있는 각색인 경우라 더 사랑받고 있으며 극의 전개도 ‘안심’하고 보게 된다는 뜻이다. 시간에 쫓겨 대본이 엉뚱한 데로 흐르거나 하지 않고, 어쨌든 마지막까지 탄탄한 줄거리가 전개될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미덕이다. 원작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이점일 수 있다. 드라마를 즐겨 보다가 이후 줄거리가 궁금해 소설을 새삼 찾아보게 되는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 소설을 먼저 본 사람들은, 이것이 어떻게 형상화될지 궁금해서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드라마의 오리지널 창작을 지나치게 고수하는 것이, 끝없이 표절 논란과 막장 논란, 쪽대본 논란 등으로 제작진을 소진시키고 작가의 수명과 작품 세계를 갉아먹는 일이라면, 드라마에 어울리는 작품을 골라 각색을 잘 해내는 일도 중요한 대안이라 생각한다. 원작은 굳이 명작일 필요도 없다. 드라마에 어울리는 이야기 구조면 된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저 재밌는 드라마면 된다. 모두에게 좋은 드라마 제작 환경에 대한 묘안이 절실한 요즘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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