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쉬람 순례를 다녀오다(2)

 

간디아쉬람 주방

우리는 세바그람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아그라역 플랫 홈에 20개도 넘는 배낭을 둥글게 쌓아 놓고 그 둘레에 앉아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다. 내일은 간디 아쉬람에 도착할 것이다. 배낭이나 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체인으로 열쇠를 잠그라는 등 서로 떠들다가 3층 침대칸에 층층이 누워 야간열차의 덜커덕대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이 들었다.

간디 아쉬람 풍경 스케치

오후 5시가 다 되어 도착한 간디 아쉬람은 평화로워 보였다. 넓은 마당과 화단에 핀 꽃들과 야자수와 꽃가지를 늘어트린 나무들이 정갈해 보였다. 건기를 살아가느라 흙먼지로 뒤덮인 길가의 나뭇잎과는 달랐다. 두 세명씩 팀을 이루어 독립된 숙소를 한 동씩 배정 받아 짐을 풀었다. 델리의 호텔에 비교하면 쾌적한 환경에 무엇보다 침대 시트가 깨끗했고 담요를 빨아서 햇볕에 말려 주는 것이 고맙고 기분이 좋았다.

본래의 간디 아쉬람은 숙소와 마주 보고 있는데 찻길 건너편에 있었다. 자그마한 여러 개의 건물들이 옹기종기 있었으며 바닥에는 완두콩알 만한 크기로 부수어 만든 각진 돌들이 깔려 있다. 한국의 생활양식과 닮은 친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야트막한 기와지붕과 나무기둥들, 토방 같은 모양, 흙으로(쇠똥을 섞었다고 함)매끈하게 바른 벽, 풀 빗자루와 문이 없는 엉성하게 엮어 만든 외부 화장실이 그대로 우리나라 6,70년대 생활 모습과 같았다. 물론 휴지는 없다. 뻣뻣한 나뭇잎을 사용했다고 한다.

제자들의 옷은 생전에 간디가 입었던 것처럼 흙빛에 동화 된 듯한 누르스름한 흰 무명을 어깨에 두르고 바지인지 팬티인지(참, 그들은 팬티를 입지 않는다)사타구니를 감싸서 허리춤에 묶은 모습이다. 얼핏 보면 옷이라기보다 구겨진 무명천을 슬쩍 휘감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또한 그들의 철학일 것이다.

아난드완 공동체 작업장
간디 아쉬람 공동체의 제자들은 간디가 생활하던 공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침상은 시트가 씌워진 채로 있으며 묵상 기도 중에 즐겨 쓰던 물레와(실제로 제자들에게 묵상 기도용으로 물레 사용을 적극 권했다고 한다) 책상과 의자가 그 자리에 본래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 유지 되고 있다. 아내를 위해 간디가 심었다는 정원의 나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간디 부부의 생활은 어땠을까? 그녀가 평범한 아내로 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간디는 브라흐마차르야(순결, 자제, 자기정화)를 완전히 달성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살아 있는 동안 그 경지에 도달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무엇으로 살았을까? 간디에 대한 신뢰심으로? 그녀의 신앙과 철학으로? 남편이 유명해지는 만큼 커지는 그늘에서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는 간디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힌두교에서 여자는 평생 동안 남자를 잘 섬기고 죽어서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도에 태어나지 않았음에 새삼 감사할 일이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신 신을 찬미한다

그들은 간디가 죽지 않고 정신 속에 살아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밤 기도 시간에 참석하여 캄캄한 기도 마당에 앉아서 바라보니 희미한 호롱불 빛에 간디의 조그마한 의자가 맨 앞에 무리를 향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물레와 조그만 악기도 보인다. 엉덩이를 대고 앉을 수 있는 넓이의 좁고 긴 카펫을 서너 줄 간격을 두어 펴고 거기에 앉는다. 10여명의 남녀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가와 노래하듯 기도하고, 끝나면 조용히 사라진다.

간디는 평소에 "나는 힌두교인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힌두교인으로 모든 종파의 상호관용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모든 종교는 진실하지만, 빈곤한 지성과 때로는 진실하지 않은 마음으로 해석하고 오역하여 불완전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간디는 세계 여러 나라 종교들 중에 좋은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호롱불을 켜고 바치는 저녁기도(아무런 책자 없이 외워서 노래한다)의 첫마디가 "남묘호렝게교"라고 세 번 외치는 것에 깜짝 놀랐는데, 우리는 이상한 종교분파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이 말 뜻에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신 신을 찬미한다’는 뜻이란다.

중간 부분에 주님의 기도가 영어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말로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쳤다. 이튿날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돌아와 미사를 드리고, 아침 공동작업에 다시 나갔다. 그룹으로 나뉘어 주방 일손을 돕거나, 마당을 쓸거나 건물 안 청소를 했는데, 일은 다 묵상기도로 통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침식사 메뉴에 신선한 우유가 올라왔다. 아쉬람에서 보내 온 우리의 수고에 답하는 선물이란다. 고소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고 가공되지 않은 천연 우유의 맛이었다. 맛있게 먹으며 예전에 이런 우유를 마신 적이 있었다고 서로 공감했다.

비노바 바베 집무실에 마련된 무덤

비노바 바베, 땅은 하느님의 것이다

간디의 수제자 비노바 바베는 인도에서 간디보다 더 유명한 존재라고 한다. 그는 브라만 태생이었지만 신분을 나타내는 시카(머리타래)를 스스로 자르고 영적 진리와 실천적 행동을 위해 길을 떠난 사람이다. 위대한 스승 간디를 만나 비폭력저항운동에 합류했다. 다음 최고의 지도자로 간디는 비노바를 뽑았는데, 그는 토지헌납운동으로 더 유명하다.

영국으로부터 350년 만에 독립한 인도가 불평등과 가난으로 신음할 때, 그는 무려 13년 동안 인도 전역을 걷고 또 걸으며 지주들에게 “땅은 하느님의 것이다. 땅은 그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누가 소유를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공기, 물, 햇빛, 숲, 산, 강, 그리고 땅은 지구의 유산이다. 어떤 집단이나 개인도 그것을 소유하거나 망치거나 오염시키거나 파괴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땅의 열매들을 하느님에게서 선물 받았으며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다시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고 외쳤다. 이 때 지주들이 헌납한 땅은 400만 에이커로 스코틀랜드만한 땅덩어리였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그는 사랑과 사상만이 진정한 힘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믿었다. 그의 이러한 믿음과 사상은 코란과 성서를 부단히 연구하고 결국 힌두교를 버림으로써 얻은 결실이었다고 한다. 일흔다섯 살이 되었을 때 비노바는 사회적 정치적 행동에서 손을 떼었고 여든일곱이 되어 몸이 약해지고 불편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고 단식하여 80일째 되는 날 지극히 평화로운 가운데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미래에는 여성의 힘이 중요하다

그는 미래에 있어 여성의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여성 공동체를 세웠다. 비노바 바베의 아쉬람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있었다. 간디의 아쉬람이 정적에 머문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비노바 바베의 아쉬람 정신은 더욱 놀랍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도 배타적으로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를 특별히 강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나 카스트에도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구영역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고귀한 사상의 영역에서 고양됩니다. 고귀한 생각에 동화 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다양한 특수성 안에서 이해를 북돋우며, 세계에 대한 태도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 우리 사고의 훈련입니다.> 그는 천재이며 선각자이고 사랑의 실천자였으며 진정한 자유인이었구나! 나는 감탄했다.

간디 아쉬람에서의 셋째 날 간디 오두막에서의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미사를 드린 후, 식사를 하고 다시 오전 노동을 하러 갔다. 어제는 물레를 돌려 만든 실타래를 세어 부대자루에 담는 일을 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마지막 작업이라 빡센 작업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젖소들의 외양간을 지나 외부 쪽으로 안내 되었는데, 쌓여있는 쇠똥을 50미터 정도 거리의 퇴비 숙성 저장처로 옮기는 것이었다.

“각오한 바요.” 우리는 웃으며 서로 쇠똥을 머리에 이고 들고 부지런히 옮겼다. 이상하게도 냄새는 별로 나지 않았다. 쇠똥이 다 옮겨질 무렵 다른 작업이 주어졌는데, 아하, 오줌통에서 오줌을 퍼내어 옮겨진 쇠똥 위에 부어 자연 퇴비를 만든다는 것이다. 한 순간 주춤했다. 웃으며 서로 농담을 하긴 했지만 솔선수범할 용기는 선뜻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강신부님이 다가가시나 했더니, 사방 일 미터는 되는 오줌통에 엎드려 퍼 올리기 시작 하였다. 우리는 그걸 부지런히 양동이에 받아 날랐다. 조심하려 해도 양동이는 구멍이 숭숭 나서 줄줄 새고 쏟아 붓는 사이에 발과 바지를 적시고야 마는 것이었다. 간디 아쉬람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걸 해 보겠어. 웃음이 한바탕 지나간다. 신선한 우유도 주잖아. 신부님 잘 하신다. 진짜 빡세네. 또 한바탕 웃음이 조용한 아침을 가르며 지나간다.

아난드완 공동체를 설립한 바바 암테 박사

바바암테 박사의 묘
아난드완 공동체를 설립한 바바 암테 박사는 깨달음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그 길을 포기하고 결혼하였다고 한다. 1914년에 이 마을을 세우고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이 고귀한 한 인간으로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후원하여 자활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기도 한 아난드완 공동체 마을에는 학교와 병원이 있으며, 농아들과 맹인 어린이들의 기숙학교도 있고, 구두와 카펫을 비롯하여 다양한 재활용품을 생산하고 있다. 마을이 꽤 넓어서 족히 읍 정도는 되어보였으며, 안내원을 따라 병원과 공장을 돌아보았다, 기계가 아닌 수제 작업으로 카펫을 짜고 있었는데 색상이나 문양이 너무 아름다웠다. 하나 완성하는데 3개월이 걸린다고 하니 놀랍다.

마을길에서 만난 아이들은 해맑고 상냥했으며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찍어서 주었으면 좋으련만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기만 해도 아주 좋아들 한다.(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어야 하는 건데). 안내자의 이야기를 듣고 더욱 감동 한 것은, 그들이 자급자족하고 남는 것은 더 잘 살기 위해서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서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다. 인도가 결코 가난하지 않은 이유다.

우리의 버스는 멜가트의 낙푸르를 향해 달리고 있다. 인도에는 인도(사람이 다니는)가 없다. 중앙차선도 없다. 물론 대도시는 다르겠지만, 교통의 혼잡은 간담이 서늘하리만큼 아슬 아슬 곡예수준이다. 분명 마주 보고 달려드는 차를 보았는데, 휴! 싸악 피해선 제 갈 길로 가고 있다. (계속)

 

이경자/ 의정부교구 마두동 성당 신자, 예수살이공동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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