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서 보낸 4년] 첫경험, 예비학교

 

부모님과 차에 올라타 간디학교로 출발했다. 학생 선발을 위한 예비학교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재수 좋게도 1차 서류전형에서 붙어서 2차 전형에 참가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2차 전형부터는 학생 면접, 부모님 면접을 보고 학생이 생활하는 걸 며칠 간 지켜본 후 학생들을 선발한다고 한다. 이런 제기랄. 다른 곳을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변화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서울 부산을 제외하곤 여행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드물 정도로 우리 집 식구들은 어딜 많이 가본 적이 없었다. 도로 위에 지나가던 모든 것들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휴게소에 내려서 먹었던 라면마저 낯설었다. 학교에 다가갈수록 새로운 사람들, 환경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과 걱정스러움이 포크레인 삽질하듯 쌓여갔다.

폐교에서 만난 간디..학교

세상에나,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학교가 논 한 가운데 명패와 함께 세워져 있던 것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산 세 개를 넘어야 등교할 수 있다’던 그런 학교란 말인가. 학교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이상한 건물 몇 채와 함께 서 있는 학교는 얼핏보면 폐교 같아 보였는데 누군가 들어와 살지 않았더라면 흉가로 변했음직했다. 한참이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진짜 폐교였다. 그렇게 나는 간디자유학교와 처음 만났다.

일찍 왔는지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곳이 정녕 학교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학교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금방 알아차리게 된 사실은 공간마다 다들 이름이 있다는 것이었다. 쌤방(교무실), 물고기방(컴퓨터실), 맛 좀 봐라(식당), 물다솜(여자 기숙사), 뫼다솜(남자 기숙사), 한마루(강당), 너나들이(휴게실), 향기마루(미술실)등. 연구실1, 연구실2에 계시는 학교 쌤들보다 훨씬 정감 있고 좋아보였다.

마지막으로 지혜마루라고 되어 있는 곳에 들어갔다. 지혜마루는 책이 많은 도서관이었다. 둘러보다 책 한 권을 빼서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군가 나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도 냅다 일어나서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했다. 가만가만, 쟤는 왜 나한테 인사하지? 그 아이는 나중에 학교 게시판 앞에서 만났을 때도 나에게 인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하나 둘씩 오기 시작했다. 몇 몇 아이들은 서로를 아는 듯 했다. 계절학교(방학 때 학교에서 진행하는 체험학교 시스템)를 다녀서 아는 애들이라고 한다. 아무도 모르는 나로선 포크레인 삽질 속도가 더욱 더 빨라진 것만 같았다. 급기야 부모님들이 ‘학부모 면접’을 끝내고 하나 둘 씩 사흘 동안 잘 하라며 자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다. 쿨한 우리 집은 “잘해라~” 한 마디 하시고 웃으시더니 논길을 가로질러 사라지셨다.

맛좀 봐라 식당

덩치가 큰 탓에 그만..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긴장감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 사이 예비학교동안 있을 반을 배정받고 이름표를 받았다. 사랑, 자유, 건강, 지혜 반. 나는 건강 반이었다.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잔뜩 긴장해서 건강 반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까 나한테 안녕하다고 꼬박꼬박 인사하던 여자애가 있어서였다. 그러자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다.

“왜 그러니? 이름표 보자. 제규. 그래 제규야 왜 그러니?”
“아 그게 ...........”

나는 누군가 나를 선생님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함께 배정받은 애들이 푸하하 하면서 웃어버렸다. 선생님은 살짝 웃으시더니 그런 친구들이 간혹 있다고 지금 학교에 있는 키가 2m나 되는 선배가 그랬었다며 내가 덩치가 커서 그렇단다. 그 여자 애는 “미안.......... 정말 예비학교 학생이 아닌 줄 알았어.”라며 안 그래도 웃고 있던 애들을 더 큰 소리로 웃게 만들었다. 걱정스럽기만 했는데 그래도 웃으며 시작하니 다행이겠거니 싶었다.

간디자유학교 지도

예비학교 생활

예비학교에서 나는 학교에서 있을 때와 다른 일들을 하며 보냈다. 학교 근처 ‘소보둥지’라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센터에 가서 나무를 심고 물을 길어오는 봉사활동을 했고, 반 별로 어떤 설문에 답하는 시간을 보냈다. 걸어서 학교 주변을 돌며 미션 수행을 하기도 했고, 같이 화합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각종 미션과 게임들을 해야 했다.

설문지의 문제 역시 한 번도 질문을 받은 적이 없는, 예를 들자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유형이었다. 나의 성격이 어떤지 검사도 해보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 하는 시간도 가졌다. 예비학교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하기도 했다. 집에서 먹기만 하던 나로선 그저 생경할 따름이었다. 누군가가 먹을 밥을 준비한다는 게 그렇게 많은 정성과 힘을 쏟아야 한다는 건지 처음 알았다.

밥을 먹을 때 나는 교장 선생님과 밥을 함께 먹었는데 그 경험 또한 새로웠다. 중학교에선 교장 선생님과 얼굴을 맞대고 뭔가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이 든 그 어르신은 매일 색깔이 다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나타났다. 늘 연단에만 서서 말만 오래하던 나이든 사람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같이 농담하고 밥 먹는 교장 선생님에 대해 다시 보게 됐다. 다른 공간을 갈망했던 나로선 내가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이곳에 오고 싶다는 마음이 커가고 있었다.

비주류 인생이 시작되려고

마지막 날 우리는 면접과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3장 이상 준비하고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어렸을 적에 바다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어렸을 적부터 호연지기를 키우는 모습이다.”라며 능청을 떨었지만 초등학교 때 영어 말하기 대회 이후로 그렇게 떨린 건 처음이었다. 면접은 3명이서 진행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기억은 안 나지만 학교에 기대하는 게 무엇이냐, 학교를 어떻게 지원하게 됐는지에 대해 주로 물었던 것 같다.

마지막 날 밤, 우리는 각자 장기자랑 하나씩 발표를 해야 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릴 때 잠깐 쳤던 피아노를 쳤다. ‘너를 처음 봤을 때’라는 곡과 'My way'를 연주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친 사람이 나 말고도 2명이나 더 있었다. 한 명은 나보다 훨씬 잘 쳤는데 “이거 때문에 떨어지는 게 아닐까.......”하면서 걱정이 됐다. 피아노보단 줄넘기가 더 자신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줄넘기 가지고 자랑하는 건 아무래도 미친 짓 같았다.(그런데 작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자기소개를 다시 하는 친구도 있었고, 종이접기를 하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는 친구, 춤을 추는 친구, 올챙이 송을 개사해서 촐랑촐랑 거리는 친구 등 제각기였다.

일주일 후 학교 쉬는 시간에 간디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나는 예비학교 합격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칠흑 같이 어둡고 타락한 삶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2005년 3월 1일. 나는 간디자유학교의 4기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엄마의 반농담조 정의에 의하면 ‘비주류 인생의 시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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