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경향신문>에 기고하는 정희진의 칼럼을 보면 항상 놀랍다. ‘낯선 사이’라는 꼭지명처럼, 그의 글은 남다르다. 약자에 대한 깊은 공감과 따듯한 시선, 그리고 인문학적 분석을 통한 명쾌한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권력과 기득권층이 유포하는 허위의식을 고발할 때는 저절로 무릎을 친다. 고마운 사람이다. 나를 포함해 글쓰기로 밥을 먹기도 하는 사람들이 글쓰기의 표본으로 삼을만하다. 예언자란 하느님으로 위장된 우상을 폭로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필자는 ‘예언자’의 반열에 서야 비로소 글쟁이 소리를 들을 만하다.

정희진은 1월 15일자 ‘그들은 저항했다’라는 칼럼에서 “저항이란 무엇일까?” 물었다. 당연히 모든 저항은 사회적 약자가 ‘권력에 반(反)하는’ 것이다. 이어 “약자가 저항하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약자는 도덕적이어야 하므로 이익보다 대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묻는다. 그리고 ‘사실상’ 절망한다. 피해자들은 저항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거나 실질적 보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오히려 2차, 3차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저항의 본질은 왜곡되고, 이들의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된다. 사회불안 조장세력이 되거나 허수아비 취급을 받으면서 누가 시켰느냐며 배후를 조사받는다.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사라지고 양비론에 사생활까지 파헤쳐진다.

이 이야기를 교회로 가져오면 고스란히 우리의 현실이 된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 특별히 고위성직자의 문제는 교회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이 교회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과 견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교회언론’의 몫이다. 그러나 교회권력의 상층부를 향한 비판은 곧잘 ‘반교회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비판자의 사회적 배경과 신앙생활 유무를 따지고, 교회불안 조장세력이 된다. 이른바 ‘교회내 좌파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결정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생존이 위태롭게 된다. 해당 기자가 교회기관에 있다면, 밥줄을 유지하기가 어렵거나 밥그릇이 작아질 위험에 놓인다.

진보적 교종이라는 환경, 교회의 언론환경도 바뀌었나

▲ 저항은 권력을 향해 던지는 화살이어서, 아픔을 동반한다. ⓒ김용길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의 약진으로 한국교회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특히 <가톨릭신문>의 보도 방향을 지켜 보자면, 전통적으로 보수적이라고 평가해 왔던 대구대교구 소유임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사회교리와 교회의 사회참여에 많은 지면을 내놓고 있다. 때로는 예전에 없던 교회 내부 문제마저 일갈할 때가 있어서 놀랍다. 반갑고 고맙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교계언론 종사자나 교회기관 근무자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체질화된 ‘자발적’ 사전검열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으며, 지금의 상황은 ‘비교적 진보적 교종’이라는 환경 때문이지, 한국교회의 체질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프란치스코 교종이 78살의 고령이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 가운데 일부는 이런 ‘프란치스코 현상’이 얼마 가지 않으리라 예측하기도 한다.

이참에 프란치스코 교종 이전의 교회 분위기를 알려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2013년 2월, 그러니까 2013년 3월 13일 프란치스코 교종이 선출되기 딱 한 달 전이다. 서울 중곡동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대회의실에서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가 열렸고, 그 결과를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취재차 참석할 수 있는지 주교회의 미디어부에 문의했다. 이에 미디어부 언론홍보 관계자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브리핑에 참석할 수 없다”며 교회언론 가운데는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만 허락된다고 밝혔다. 이유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비공인 단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교회의 미디어부에서는 보도자료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는 보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다른 종합일간지에는 늘 보도자료를 보내지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보도자료 발송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보도자료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느냐?”는 질문에 미디어부 관계자는 “없다”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이 황당함이란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교회 안에서 인준을 받은, 그래서 담당사제가 파견된 언론사는 아니지만, 서울시에 등록된 엄연한 법정 언론사다. <가톨릭신문>은 대구대교구 소유의 언론사이며, <평화신문>은 서울대교구 소유의 언론사로서, 모두 언론사 사장이 신부다. 그래서 이 언론사들은 교구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교구 방침에 충실한 언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날 기자 브리핑은 ‘자발적 자기검열’에 익숙한 교계언론사 기자들과 교회 내부 사정에 어두운 일반 종합일간지 기자들만 모여서 연 셈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교회 인준을 청하거나 담당사제를 두지 않는 이유는 ‘언론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함이지, 교회를 음해하거나 교회를 싫어하거나, 교회를 상대로 싸우기 위함이 아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하느님 자비 안에서 정의를 실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우리 사회 안에서 실현하고, 교회 역시 자신의 복음적 신원을 회복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평신도들이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자발적으로 창립한 언론이다.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인터넷 대중매체다.

교계의 감시견제기능, 누가 해야 하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2차 총회에서 발표한 “세계정의””(Convenientes ex Universo, 1971)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감히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다른 사람 눈에 정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교회 안에서의 행동규범, 교회재산, 그 생활양식 등을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38항)고 말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사상과 표현의 정당한 자유의 권리를 인정한다. 여기에는 또한 대화의 정신으로 각자의 의견이 충분히 청취된다는 권리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써 교회 안에는 의견의 다양성과 상위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41항)고 밝혔다. 이어 “일정한 체제 속에 갇혀 있는 학교나 홍보 수단들은 그 체제대로의 인간상만을 계속 형성할 뿐, 새 인간상을 형성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장애를 받는다”(45항)고 지적한다.

결국 주교회의 미디어부의 태도는 단지 공인, 비공인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교회문제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살아 있다는 표징이지만, 교회권력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언론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독립언론’이 교회를 잘 알면서 교회 내부를 향해 발언할 때 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게 비난과 탄압을 받은 적은 있지만, 언론을 통해 교회문제 자체에 대한 검증과 비판에 직면한 적은 별로 없었다. 개신교는 논조가 서로 다른 다양한 언론매체가 활동하고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교구 소속 언론사 두 곳만 인정하고 있다. 언로(言路)가 차단된 공간이 교회라는 뜻이다. ‘언로개색 흥망소계’(言路開塞 興亡所係)라는 말이 있다. 말길이 열리고 막힘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다는 뜻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종합일간지의 경우에는 종교 문제를 다룰 때 특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종교의 내부 문제는 그 자체로 일간신문의 큰 관심 대상이 아니며, 다만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행사나 사건에 대한 단순 보도에 그치고 있다. 물론 당시 주교회의 미디어부 관계자의 태도가 주교회의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비판적 교회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읽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천명했듯이 ‘교회’는 그 자체로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 끊임없는 ‘쇄신’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복음적 원천으로 돌아가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감당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교계감시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나 단체가 전혀 없다. 개신교의 ‘교회개혁실천연대’는 2002년에 출범해 벌써 10주년을 훌쩍 넘겼다. 개혁연대는 그동안 민주적 정관 갖기 운동, 건강교회 재정 운동, 교단 총회 참관 운동, 교회 내 문제로 고통 받는 신자들을 위한 상담, 교회 세습 반대 운동 등을 벌여 왔다. 상근 활동가와 집행위원, 전문위원을 합쳐 6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2012년 인권연대가 주는 ‘제3회 종교자유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교회개혁을 주목적으로 하는 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가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교계조직이 권력이 아니라 ‘봉사’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누군가 교계에 대한 비판과 감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소액후원자에 의해 유지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그나마 가톨릭교회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비판언론’이며, 2010년 인권연대에서 주는 제1회 ‘종교자유인권상’을 받은 가톨릭언론이다.

주교회의에서 <매일미사>를 발간하면서, 개인 사업자가 발간하던 <오늘의 말씀>이 폐간되는 과정에 대한 보도 이후에, 지난 2010년 주교회의 사무처장 신부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며 “<가톨릭다이제스트>에는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떼라고 이미 공문을 보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도 교회인준을 받지 않았으니 알아서 ‘가톨릭’이란 말을 뺐으면 좋겠다. 그러나 당장에 요청 공문을 보낼 생각은 없다”고 구두로 전한 바 있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명칭을 두고 이런 논란이 없었지만, 실정법과 교회법적으로 ‘가톨릭’이라는 단어 사용의 적합성 여부보다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대한 친자 소송을 벌이는 것 같아 심정이 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사무처장 신부의 입장은 “우리 호적에 올라와 있지 않으니 넌 내 자식이 아니다”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를 덧붙이자면 <가톨릭다이제스트>는 지금도 그 이름으로 잘 나가고 있다.

▲ 교회언론의 역할을 대신하는 교종 프란치스코. 그래서 교종은 보수적 교회 안에서 외로울 수도 있다. ⓒ김용길

교회언론, 교종이 대신한다

지금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일부 독자들에게 “교회에서 뭐라고 안 해요?”라는 질문을 곧잘 듣는다. 그러면 “없는데요”라고 딱 잘라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종 이후에 시절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교종은 교회란 ‘야전병원’과 같아서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이들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의 털만 매만지는 미용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 대목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교종은 지난 성탄절에 즈음해 바티칸 클레멘스 홀에서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황인 자신을 추앙하는 ‘보스에 대한 지나친 찬미병’을 고쳐야할 질병이라고 지적하고, “자기비판과 자기 갱신, 자기 혁신이 없는 교황청은 병든 육체”라고 비판했다. ‘영적 치매’라는 표현이 나오고,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잘난 체하는 병까지 지적했다. 15가지나 되는 많은 교황청의 질병이 교황청만의 질병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교종이 교황청을 빗대어 전 세계 교회 고위성직자들의 냉담함과 권위주의, 영적 세속화 등을 비판한 것이다.

지금은 교종이 ‘교회언론’을 대신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지적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역할을 교종이 직접 하고 있다는 말이다. 확언하건대,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황청 안에서,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보수적으로 길들여진 수많은 고위성직자들 사이에서, 그들에게 불편한 발언을 거듭하면서 무척 외로울 것이다. 교회의 최고권력인 교종이 전 세계 교회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 저항이 눈물겹다. 성탄이 끝나기 무섭게 조만간 사순절이 시작되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를 묵상할 것이다. 그 대열에 그분도 함께 하고 계시는 것 같아 죄송하고, 든든하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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