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복 받으라고요?]

복 복 복짜로 시작되는 말은... 복음 복어 복구 복창 복조리, 복지리.
복 복 복짜로 끝나는 말은.... 행복 전복 중복 말복 여자복, 남자복.

어릴 때부터 익숙한 멜로디에 가사를 끼워 맞춰 흥얼대 봅니다. 복으로 시작되고 마치는 말은 이 밖에도 더 많은데, 우리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생각이 서로 다른 만큼 ‘복’이란 말에서 오는 의미들도 다채로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뜻하고 기대하는 것은 ‘행복’과 연결된 의미일 텐데, 좀 더 풀어보자면 ‘좀 더 나은 형편’ 또는 ‘현상유지’와 같은 의미가 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전자는 하루하루 살기가 쉽지 않은 민초들이, 후자는 부자들이 빌었을 법합니다.

또 새로이 주어진 한 해의 시작. 때가 때이니만큼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의 복을 빌어주는 요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의 본 의미는 얼마 전부터 유행하는 말로 하면, “새해 부자 되세요!” 또는 “새해 대박 나세요!”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가 겪고 있는 시름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보며,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는 것이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밀려옵니다. 그런 말을 파렴치한 공직자들이나 재벌들이 하는 걸 보는 건 ‘멘탈 갑(甲)’들이나 할 일입니다. 속이 비좁은 나는 병원비나 아껴보려는 소박한 바람으로 티브이와 거리를 유지합니다.

새해 인사에 대해 내심, 작년보다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라며 신음하는 이들이 적잖이 있음을 느낍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것은 이 와중에도 ‘지속적 성장’을 외치며 조금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는 아랑곳 않는 파렴치하고 비정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 너무 막연한 일처럼 보이는 요즘. 적어도 재벌 수준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판타지이고, 아끼고 아껴 남은 돈, 조금이라도 저축할 수 있는 정도를 꿈꾸기도 너무나 힘든 이 세태에, “부자 되세요”는 영혼 없는 인사말, 그것일 뿐입니다.

▲ 예수는 존경한다면서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은 거부하는 사람들, 예수의 행복선언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김용길

그렇다면, 참으로 영혼이 담긴 축복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빛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산 위의 가르침’ 도입부분(마태 5,3-12)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행복하여라” 또는 “복되어라”로 시작하는 일련의 축복선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마음은 기쁨이 아니라 장엄함으로 기웁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우리를 부유함이나 건강과 같은 세속적인 기대보다는 오히려 그 흐름을 거스르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예수는 존경하다면서도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이들은 이게 무슨 행복선언이냐 하겠지만, 곱씹어 보시라.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시름시름 앓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숨겨져 있기에 ‘참으로’ 복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을 참으로 찬양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내적 환경이 설정될 때, 부유함이나 명예나 육적인 건강함은 원 플러스 원 상품에 딸린 사은품과 같은 것일 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집착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산 위에서 행복선언을 들은 이들은 그러므로 내세의 삶만을 기대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확보한 내적인 자유는 그 무엇으로도 옭아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난도, 슬픔도, 자기 헌신도,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세상을 ‘지금 여기에’ 앞당겨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받을 상’(마태 5,12)은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자유에 열심히 동참한 노력의 결실이지 초등학교 졸업장처럼 주어지는 의무교육의 산물이 아닙니다. 교육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고 싶은 것은, 예수님에게 참된 복을 진작 깨우쳐 준 사람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성모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어떤 사람이 유다인이려면 그의 어머니가 유다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처럼 아이의 양육에 관하여 어머니의 권한은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나 명백해서 성경에 굳이 기술할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그래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친 증언이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우리는 엘리사벳이 성령의 기운을 통해 말한 복이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행복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데 있습니다(루카 1,45).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것인지는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나약하고 비천한 이들을 잊지 않고 보살피시는 구원의 하느님이 계시기에 기쁘고 영원히 행복하리라고 선언합니다. 교만한 자들, 세상의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 대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 비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에게 자비를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양이 솟아나옵니다. 아무래도 신자들 사이의 새해 인사는 바꿔보는 게 좋겠습니다. “복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기뻐하십시오.” 이 축복을 듣고 ‘내가 어째서 비천하다는 거지?’ 하는 맘이 든다면 하느님께 그 사람의 자리는 없는 거겠죠!
 

박종인 신부/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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