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등불 켜고]

 

필자, 함태식
오늘은 1801년 신유박해가 있던 날이다. 이 날 당시 천주교 지도자들을 거의 대부분 처형 혹은 유배에 처해졌다.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으며, 권철신, 이가환 등은 옥사했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되는 등 300여명에 이르는 대부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신유박해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그 내막을 이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학이라 불리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쳤던 정조가 죽고 난 후 그간 정치적인 열세에 놓였던 노론과 남인 벽파에 의해 벌어진 정치적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특히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쉽게 한국 천주교 전래에 대해 순교할 만큼 신앙심에 가득한 분들의 죽음으로 단순화 하는 것은 때론 교회 내적인 신앙심을 고무할 수 있어도 냉철히 바라보면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가 시작 될 무렵 조선사회는 소위 상업자본이 축적되던 시기였다. 봉건제를 유지하던 세습적 계급사회가 무너져가고 계급과 상관없는 상업자본가들이 등장한다. 유교적 계급 정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조선 사회를 유지할 동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대안을 마련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정조 이후의 조선사회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충돌 시기였으면 새로운 대안에 대한 가치체계의 시험장이었던 셈이다.

우선 기득권을 가진 정치인들은 유교적 정치 이데올로기의 보존을 희망한다. 이들은 다른 가치의 전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매우 폭력적으로 그 맹아를 잘라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봉건 체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유일한 통로가 된다.

한편 유교적 정치 이데올로기 중 절대 왕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한편 또 다른 가치 체계와의 절충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관계를 희망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우리가 쉽게 말하던 실학파일 것이고 대부분 이들은 중앙 정치에서 밀려난 젊은 남인 시파들이다. 이들에게 천주교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열어주는 정치적 가치체계였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천주교에서 멀어진다. 1801년 이승훈, 정약종과 달리 정약용, 정약전이 유배를 떠난다. 종교로서의 천주교를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를 부정하거나 떠난 이들이 이 때문에 폄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가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이나 제국주의 시기 선교사들의 성서를 앞세워 살육하고 점령되던 식민지 전쟁과 마찬가지 일 뿐이다. 더욱이 이들은 종교적인 틀에서는 벗어나 있을지언정 새로운 가치의 현실적 적용에 힘썼던 정치인들이었다.

한편 이러한 혼란기에 나타나게 되는 세 번째 선택은 혁명이다. 로마 가톨릭의 지배가 갖가지 부작용을 빚던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바로 현재 우리가 보는 가톨릭의 정신이다. 시대적 가치의 변화가 혁명을 선택한 것이지 가톨릭 정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신유박해 이후 가톨릭 지도자들 중 정치인들은 떠나고 민중들만 남는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타협하거나 죽고 민중들의 꿈만 남는다. 정치인 은 좌절하지만 민중들은 새로운 가치를 신앙한다. 이들은 소박하게 숨어 지내기도 하고 혼근 구 질서를 거부하다가 죽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이 새로운 가치를 막지 못한다. 구 한말 천주교의 전래와 확산은 정치인들의 자발적 선교가 아니라 민중들의 자발적 신앙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분들은 이미 읽었고 또 실천적으로 삶에 받아들였다.

19세기 중반부터 격렬해지기 시작하는 천민들의 난이나 세기말 동학, 미륵사상 등은 정치적 가치의 관점에서는 가톨릭 정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더욱 복잡한 분석은 있겠으나 그 당시 민중은 절대 왕조를 부정하고 평등한 세계로의 발전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교회는 시대적 징표와 변화하는 가치를 선취하지 못하고 민중들 속에서 매우 늦게서야 읽어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1963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바로 이 “시대의 징표를 읽자!”였다. 그리고 당시 좌우의 대립의 절정이었던 냉전시기에 과감히 인권이 정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임을, 정의가 사회 가치의 근본임을, 그리고 자본은 선하게 사용되는 한에서만 허용되어야 함을 천명했다. 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부는 자신들의 권리가 아니고 가난한 자들의 희생 속에 얻어진 것임을 가르쳤고, 타 종교와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 후 그 공의회가 찾았던 “시대의 징표”는 어느새 고루한 문헌이 되어버렸으며 “화해와 쇄신”은 그저 선언에 불과하게 되었다. 교회도 교인도 이제 공의회를 잊었다. 오히려 그 골은 더욱 깊어만 가고 더 이상 교회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동서의 간격은 무너졌을지언정 국가 간 양극화와 개인 간 양극화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만 갔다. 그래도 교회는 어느 정도의 구호와 자선을 제외하곤 소리 높여 말하지 않았다.
200여 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신유박해와 참상은 비록 이름만 달리하고 있을 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때 그 분들이 원했던, 지금으로 보면 아주 작은 소망들은 아직도 미결일 뿐이다. 그 분들이 죽음으로 지키고자 있던 것은 종교적 자유와 하느님께의 신심이었다. 그러나 실제 그분들의 죽음의 이유는 그분들이 발칙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봉건제와 불평등을 부정하지 않는 종교였다면 그분들이 죽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나온 모든 시간동안 우리 사회는 수많은 순교자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시간이 많이 흐른 후 그제서 그분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 교회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오게 될 그 분들의 발칙한 꿈을 지켜주어야 한다. 아니 교회가 먼저 꿈을 꾸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러한 순교자가 나오지 않도록 교회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 예언자가 없는, 제의만의 교회가 얼마나 부패해지고 또 스스로 멸망해 갔는지 구약을 통해 늘 듣지 않는가. 그리고 로마제국의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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