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등불켜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며칠 전 영면하셨다. 언제였던가. 매우 젊었을 적,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 한 언저리에 몸담고 있던 나에게 추기경은 그 어떤 의미 이상이었다. 그 때 내 가슴 한 모퉁이에 자리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게는 또 무엇을 지시하고 있을까? 추기경을 모셔둔 자리로 향하는 내 마음은 무척 많은 생각들이 추억과 함께 교차하고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들을 살라 시대에 바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곳에는 어떤 이기심도 어떤 치기도 없었다. 그러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라졌고 또 남은 이들은 남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애써 숨죽이며 타협을 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고 이시대를 숨죽여 살아가고 있다. 달력 한 장이 넘어가면 또 한 장에서 먼저 간 그들의 얼굴이 다시 떠 오르고, 그렇다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도 않건만 아직도 미안해하고만 있다는 자괴감에 허튼 술 한 잔으로 취해서 잠에 빠져들곤 한다.

작년부터 촛불이 일어나고, 이젠 좀 나아지지 않았느냐며 엄한 핑계를 대던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거리며 청계천으로 나가기도 했다. 다시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제 한 세대가 넘어 지났건만 과거와 한 치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을 넘겨준 그 후배들 얼굴을 볼 낯이 없어 작은 소리로 구호를 외치곤 했다. 그렇다. 달라진 건 없다. 군부독재에서 자본의 지배로 바뀌었을 뿐 그 정도는 더욱 교활하고 그들은 몰라보게 영악해졌다. 그래 이것이 세상의 본질이리라. 

엽서 한 장이 세상을 바꾸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도 그 분들 중 한분이셨다. 그 때였다. 언론이 한 사람의 손에 농락당하고 있던 그 때,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조차 외면당하고 있던 그 때,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던 권인숙은 동료 노동운동의 배후를 캐묻던 질문과 고문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성고문. 그것이 알려지자 정부는 이렇게 말했다. “좌파들이 성 조차 혁명의 도구로 이용한다.”고. 그리고 그 사건이 묻혀갈 즈음 김수환 추기경께서 참혹한 지경에 놓인 권인숙에게 한 장의 엽서를 보낸다. 위로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그것은 분노도 투쟁 지침도 아니었다. 그 한 엽서가 세상을 바꾸었다.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국민이 분노하게 되고, 권인숙에게 다가선 김 추기경을 믿고 그 분의 옳음에 의지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바로 성고문 그것이 진실이었음을 추기경께선 엽서 한 장으로 세상에 알려주었다. 그 국민들에게 김 추기경은 누구였을까? 도대체 어떤 것을 그 분으로부터 받은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이라고 하는 존재는 매우 나약하다. 비록 가슴에 품은 정의는 있을지언정, 작고 크게 세상과 또 자신의 이기심과 쉽게 타협해버리고 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자주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곤 한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그리고 도덕적 판단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권인숙 사건 뿐 아니라 모든 정치적 도덕적 판단에 있어 종교 지도자들의 말 한마디는 그렇게 무겁고 깊다. 그것은 오직 김수환 추기경으로 대변되는 높은 분들께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작은 성당의 강론대도 그렇거니와 작은 절집의 스님조차 그렇다.

그렇게 종교 지도자들은 국민 아니 시민들로부터 도덕적 정치적 가치판단을 위임받았다. 사람들은 그 분들의 지혜와 양심을 기대하고 그분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자신을 귀속한다. 그렇다. 권위를 위탁한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다. 그 종교 지도자 분들은 하느님의 입이고 귀다. 그분들은 신을 대리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것을 이유로 “가르침”을 허용 받는다.

그분들은 작고 큰 현실의 사건들과 하느님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에 그 가치판단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분들이 인정한 것은 백성들도 인정할 것이고, 그분들이 배척하는 가치는 백성들도 그렇게 한다. 그분들에게는 시체말로 도덕적 인증서를 발행할 권위가 주어진 셈이다. 권인숙 사건에서 김 추기경께서는 권인숙에게 그 인증서를 엽서라는 형식으로 발행해 주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말 한마디는 그래서 무겁다. 본인의 판단과 말 뿐 아니라 그 인증서는 받은 이들에게 엄청난 권위를 북돋아 주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권위에 복속할 것을 묻게 되는 것이다.

함부로 인증서를 내어주면 안된다

나는 최근 김 추기경을 향해 사람들이 들이미는 여러 비판을 막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한편 그 비판에 교회가 진심으로 귀 기울이길 바란다. 이번 장례 행렬에서 나는 심한 욕지기를 참을 수 없었다. 추기경과 친분을 과시하며 그 자리를 하이에나처럼 배회하던 그 끝없이 오만한 자들을 정말이지 바라볼 수 없었다.

 

김 추기경을 영웅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기사도 역겨웠지만 그렇게 만들어두면서 추기경으로부터 “인증서”를 발급받은 것으로 목에 힘주고 있던 그들과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 슬프지만, 그리고 아주 비참하지만 추기경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도덕적 가치의 인증서를 근 몇 년 발급해주셨다.

침묵은 때론 금이지만 때론 말없음으로 인정해주는 동의의 절차다. 오늘 일어났던 이 땅의 그 참혹한 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균형 잡힌 일이 아니라 침묵으로서 동의해주는 것이다. 나 또한 돌아가신 김 추기경을 비난하고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덕담과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이 땅에서 그토록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그 “인증서”를 회수하여 그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라는 것을 교회는 제발 알아주길 바란다.

좌절이 희망보다 손쉬운 시절

교회 밖으로 한발 만 나오면 바로 암흑 같은 우리나라가 펼쳐져있다. 한편에서는 땅 잔치를 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다시 저 먼 곳으로 나가 천막을 짓는다. 자본이 자본을 불려나가는 동안, 한편에서는 가난이 가난을 세습한다. 같은 날 태어난 아이들이 서로 질시하고 불평등한 기회의 현실에 숨죽이고 통곡한다. 이젠 좌절이 희망보다 손쉬운 시절이다.

교회는 정치적 중립, 사회관계의 조정자가 아니다. 교회는 모든 이들의 교회일 수 있으나 지금은 결코 모든 이들의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어떤 판단의 시절이 오면 어느 한 편에 서야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중립이었던가? 그들이 내어준 인증서에는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가.

김수환 추기경의 영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을 터이다. 그 가르침 중 하나는 분명히 그 분이 내어 놓은 그 인증서다. 권인숙도, 명동으로 도망쳐 온 수배자도, 박종철도, 그리고 수많은 민주화 동지들도 고맙게 인증서를 받았고, 그 희망이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우리 안에 남아있다. 그러나 한편 장례에 와서 갖은 오만을 떨던 그들도 받았다. 민주화 동지들은 그것을 받았음에도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아직도 숨죽여 고백하고 미안해하고 있음에도, 그자들은 연일 신문에 내고 마치 자신들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음을, 김 추기경이 자신들을 지지했음을 떠벌이고 다닌다.

추기경의 죽음은 대중들로부터 그 권위를 위탁받은 종교 지도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설혹 추기경께서 비판받는다 하여도 그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감세와 자본의 통합을 외치는 그자들의 목소리와 불 속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며 작게 내지른 그 비명을 가려들을 수 있으면 된다.

종교지도자들이여, 제발, 제발 어두운 곳의 빛이 되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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