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 신부]

11월, 한해의 끝이 보이는 때가 성큼 다가왔다. 삶의 끝을 생각하기에도 적기다. 그래서인가, 11월, 위령성월이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는 때, 그러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때다. 위령성월은 ‘모든 성인 대축일’로 시작된다. 죽음이 ‘성인(聖人)’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일까?

교회에서 성인으로 선포되기 위한 첫째 조건, 죽음이다. 어느 누구든 죽어야 성인이 될 자격이 생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맞는 말이다. 삶은 죽음으로 완결되고, 한 사람의 최종 평가는 사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한, 변화의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성인들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성인’들이 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이 이를 말해준다. 내가 알고 지내던 평범한 이웃도 성인일 수 있다. 성스러움은 위대함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인(偉人)이 곧 성인(聖人)은 아니다. 성스러움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 속에 묻혀 있는 경우도 많다. ‘모든 성인 대축일’, 평범하지만 성스러운 삶을 살고 간 많은 이들을 기리는, 소박하고 정겨운 날이다.

성인은 어떤 사람일까? 죄 짓지 않으면 성인일까? 오직 하느님만이 성스럽고,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성스럽다고 이해하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성스러운 하느님으로 인해 성스럽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훼손하는 죄를 저지르면, 나는 더 이상 성스럽지 않다.

성인이 되고 싶은가? 죄 짓지 말지어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한데, 뭔가 개운치가 않다. 죄의 관점에서 보니, 성스러움은 기본적으로 내게 달린 문제가 되어 버린다. 성인이 되려면, 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긴장과 강박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삶, 힘들고 재미없다.

과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 삶일까? 우리에게 과제를 부과하고, 그걸 우리가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를 성인과 죄인으로 가르는 분, 이런 분이 사랑과 연민의 하느님일까? 예수는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이와 관련해, ‘모든 성인 대축일’ 복음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복음은 성스러움도 죄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복음은 대신 “참된 행복”을 말한다.(마태 5,1-12)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는 가장 먼저 이렇게 선언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들은 누구인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참으로 행복한 까닭은? 하늘나라가 그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성인들이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의 성스러움으로 성인이 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내 힘으로 죄 짓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그래서 성인이 되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성인 대축일’ 둘째 독서도 복음과 같은 맥락이다.(1요한 3,1-3)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곧 성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사랑 때문이다. “그분께(하느님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순결하게 된다. 성인이 된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떻게 성인이 되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하지만, 치열한 경쟁이 휘몰아치는 현실에서 이 말은 현실을 모르는 한가로운 소리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우리의 삶을 평범함 속의 성스러움으로 이끌어주는 위령성월의 제안이다. 인간의 삶, 삶인 동시에 죽음을 향한 여정이다. 내 앞에 상반된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놓여 있다. 참된 삶의 방식, 참되지 못한 삶의 방식! 내가 아니라 세상이 내 삶을 결정하도록 놓아두는 것, 참되지 못한 삶의 방식이다.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세상의 흐름과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먼저 추구할 것인가?” 내 삶의 소중한 질문들, 하지만 내가 아니라 세상이 결정한다. 나는 그저 그 결정에 따라갈 뿐. 내 삶이긴 하지만, 그 주인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다.

이와 대조적인 삶의 방식도 있다. 주어진 환경의 제약 속에서도, 내가 내 삶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 참된 삶의 방식이다. 세상의 흐름이 아무리 거대해도, 내 삶을 그저 거기에 내맡기지 않는다. ‘내’ 삶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내가 결정한다. 내가 바로 내 삶의 주인이다. 우리 대부분은 참된 방식의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선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과 불이익이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난도 감내해야 한다.

어떻게 참된 방식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낼 수 있을까?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라는 엄정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홀로 대면하는 것.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참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된다. 죽을 때 후회하고 말 것을 얻느라, 한번뿐인 내 삶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치열하게 알맹이를 찾되, 껍데기는 과감히 버린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솔선하여 보여주신 가치를, 그 삶의 방식을 내 것으로 한다. 예수를 따라, 내 눈을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주위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돌린다. 내 마음을 아낌없이 나눈다. 그럴 때에, 나는 예수께, 하느님께 속해 있다. 예수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나는 성스러워진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평범한 삶 속에서 이미 성인으로 살아간다. 참 행복을 누린다.

위령성월, 우리는 죽은 이들을 기리면서, 자신의 죽음을 성찰하고 삶을 반성한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인 죽음의 자리에 서서 볼 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죽음은 ‘떠남’이다. ‘떠남’은 가진 것을 놓으라 한다. 가진 것 그대로 떠날 수는 없다. ‘떠남’으로써, 지금 내 자리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절절히 깨닫는다. ‘놓음’으로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가라지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내 삶의 방식과 태도도 달라진다.

위령성월, 교회는 우리를 죽음의 성찰을 통해 성인의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기꺼이 여기에 응답할 때, 우리는 죽음 저 너머, 새로운 시작,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그 희망으로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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