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교회와 세상]

만리장성, 중국집 이름이다. 이름이 중국집이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드는 짜장면이 더 많은 현실에서, 그래도 객지에선 만만한 음식이 중국집 짜장면, 짬뽕이다. 우연히 이정록의 <시인의 서랍>이란 책을 읽다가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대목이 있어서 먼저 소개한다. 이정록은 “‘만리장성’이란 단어나 사진을 보면 긴 면발의 국수 가닥이 떠오른다”고 했다. 늘 꼬르륵거리기만 하는 허기를 때우는 오랜 안식구 같은 중국집 면발이다.

언젠가 자동차가 즐비한 중국집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정작 중국집 안에 발을 들여놓은 이는 그 이밖에 없었다. 시인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연신 저 같은 풋내기 여행자가 문을 열기만 기다렸다. 그러다 출입문이 열렸는데 누더기 승복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들어와 목탁소리에 맞춰 불경을 입속으로 중얼중얼 외고 서 있다. 오후 2시쯤이었다. 슬리퍼를 끌고 나온 주인 아주머니가 “여기 있어요!” 하며 퉁명스레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자, 스님은 바랑을 뒤져 삼천 오백 원을 더 꺼내놓았다. 방금 아주머니에게 받은 천 원을 더하면 짬뽕값 4500원. 그가 벌어들인 수입이 즉석에서 먹을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짬뽕 그릇을 건네는 아주머니의 눈빛에도 웃음이 잡혀 있었다.

탁발승의 쓸쓸한 끼니에 덧대어 당나라 때 승려시인 가도(賈島, 777-841) 이야기가 끌려 나왔다. 가도는 ‘이응의 유거에 부침’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막혔다.

이웃이 적어 한가로이 살고 閑居少隣幷
풀숲 오솔길은 환원으로 드네 草徑入荒園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리를 잡고 鳥宿池邊樹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鼓月下門

가도는 마지막 구절에서 “스님은 달빛아래 문을” ‘민다’(推, 퇴)고 해야 할지 ‘두드린다’(鼓, 고)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우연히 길에서 맞닥뜨린 당대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고’를 추천했다. 문을 ‘민다’는 것은 바랑을 멘 스님이 날이 저물자 자신의 암자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저 밀고 들어가면 될 뿐이다. 문 여는 소리야 나겠지만 조용히 자신의 방에 들어가 짧은 독경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것이다. 탁발과 고행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문을 ‘두드린다’ 함은 늦은 밤 스님이 외딴 집이나 낯모르는 암자를 찾은 이방인이 된다. 스님은 여전히 고행의 복판에 서 있다.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낯선 길이 남아있다. 동자승이 눈 비비며 나올 때 설핏 잠들었던 연못가의 새들도 잠자리를 고쳐 앉을 것이고, 큰스님께 조용히 여쭙는 동자승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다음엔 찻물을 따르는 그림자가 암자의 단조로운 문살에 비칠 것이다. 문을 밀면 편안하지만, 문을 두드리면 고달프지만 아름답다.

불가에서도 탁발의 전통이 사라지고 운수납자(雲水衲子)라는 말이 낯설지만, 제 노동으로 제 살림을 거두지 못하고, 마을의 선행과 자비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가톨릭 사제들도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물론 바오로 사도 같은 이는 스스로 천막을 지어 생계를 도왔다고는 하지만 사도가 처한 특별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오늘날 사제들은 직간접적으로 여전히 ‘탁발승’에 가깝다. 교우들의 선의가 아니라면 교회가 유지될 수 없을 뿐더러, 사제들은 배를 곯아야 한다. 인민들의 반발을 사서 1789년 대혁명을 겪었던 프랑스 교회가 가난을 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늘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를 입에 올렸지만, 사제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역시 ‘가난’이다. 그래도 먹고 살만은 해야 사제생활도 가벼울 텐데, 예수처럼 이삭을 훑어 먹어야 할 만한 적빈(赤貧)이라면 사정이 달라질 법 하다. 그처럼 벌거벗은 가난이 아니라면 가난은 ‘내가 누군가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고 겸손하게 백성을 섬기는 사제의 영성이 돋아 오르게 한다.

ⓒ한상봉

한국교회 안에서 ‘성직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특히 대도시 본당의 하급사제들이 겪는 고충과 아픔도 헤아려야 한다. 신도시일수록 가방끈 꽤나 길게 배웠다는 신자들과 방귀 꽤나 뀌었다는 유력한 신자들이 많아서, 오히려 사제들이 신자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이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때로 근력마저도 나은 사목회장이 사제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본당이 많아서, 강론 시간에도 사제는 ‘소신’(所信)을 밝히지 못한다. 단촐하게 본당을 빠져나와 광화문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 가야 하는 사제들, 이들은 벗이 그립다. 호령하면 말 잘 듣는 신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의 참뜻을 함께 새길 만한 동료 그리스도인이 아쉽다. 그래서 농성장에서 만나는 다른 본당 신자들이 오히려 자매요 형제처럼 느껴진다.

사회교리를 ‘행할 교리’라 주교회의 의장이 가르치고, 교회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서둘러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는 상황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듬어 안고 귀국길에 올라서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리본을 떼지 않은 교황이 “고통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소용없는 신자들도 많아졌다. 이들은 지금 슬픔에 젖어 있는 이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사제들을 ‘종북’이라고 서슴없이 부르고, 심지어 본당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천주교선언’ 서명을 받던 데스크 앞에 놓여진 현수막을, 들고 있던 우산으로 찢는 신자도 있다. 이 참담한 현실을 본당 주임사제도 어쩌지 못한다. 타이른다고 수긍할 기세가 아니다.

이 정도면 사제들도 목탁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탁발승이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다. 본당사제로 산다는 것, 예전처럼 만만치 않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마따나 충분히 ‘세속화’ 되었다. 교황이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이며 복음적인 선택’을 선언하고 따끔하게 주교들에게 훈계할 수 있겠지만, 정작 일선 사제들은 본당에서 ‘복음’을 전하기가 버겁고 때로 두렵다. 오히려 ‘무지개 같은 번영신학’을 선포해야 반기는 신자들이 많다면, 복음은 ‘교회 밖에서’ 오히려 반가운 악수를 나눌 것이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교종이 그래서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도로시 데이와 함께 가톨릭일꾼(CatholicWorker) 운동을 시작했던 피터 모린이 “이미 성전은 장사치들이 저당 잡았다”고 한 말은 헛말이 아니다. 사제들조차 ‘가난하게 살 자유’를 박탈당한 교회,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선택이 금지당한 교회, 사회교리가 불온문서로 취급당하는 교회, 그런 교회를 떠날 수도 없고, 안고 가기에도 버거운 사제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연대’는 교회 밖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뜻있는 사제들과 신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 이름으로 맘몬을 섬기는 기득권층의 포로가 된 교회를 해방시켜야 한다. 지금 ‘가난한 사제’들은 복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 것이니.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듯이, 가난한 사제들의 고단한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들이 시방 우리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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