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퇴보시킨 결과”, “궤변” 비판…대수천은 “사법부 존중”

2012년 대선 때 국가정보원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단을 받았다.

▲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취재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성호

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는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국정원 심리전단의 트위터 활동과 댓글을 국정원법 위반으로 보면서도, 선거법 위반으로는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정 정당,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방하는 정치 관여는 인정했지만, 선거법은 어기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판결에 대해 천주교에서는 ‘정치 논리에 의한 판결’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국정원 대선 개입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은 천주교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2013년 6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 8개 단체를 시작으로 지난 4월까지 시국선언과 미사가 이어졌다. 2013년 9월까지 군종교구를 제외한 한국 천주교 15개 교구 전체에서 사제 시국선언이 나왔고, 그때까지 사제 총 4,835명(주교회의 온라인 주소록 기준) 중 약 43%에 달하는 2,124명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지난 2월 3일 ‘부정선거 불법당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봉헌하며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던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의 김영미 수녀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수녀는 12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재판 결과는, 국정원이) 정치 개입은 했지만 대통령선거 개입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이 판결은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결과”라고 평가했다.

▲ 지난 2월 3일 오후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와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정의평화환경전문위원회가 서울 예수회센터 성당에서 ‘부정선거 불법당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이어 김 수녀는 재판부가 원 전 원장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할 경우 대선 결과의 정당성이 흔들리게 된다며 “그런 시나리오가 불 보듯 뻔하니 재판부가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수녀는 “등불을 됫박으로 덮을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이미 드러난 것을 자꾸 가리려고 하면 국민 전체를 우롱하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혐의를 강력 비판해 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표 나승구 신부도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무죄 판결에 대해 “몹시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나 신부는 “사법부가 법과 정의에 의한 판결이 아니라 정치 논리에 의한 판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법부 스스로 매우 부끄러운 일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9월 23일 정의구현사제단은 서울광장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해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전국 시국기도회’ 때 발표한 시국선언문에서 “원세훈, 김용판 등 국정원 사태와 관련된 모든 범법자들은 엄중히 처벌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었다.

한편, 이러한 시국선언에 반대하는 입장을 펴 온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대수천)의 이계성 공동대표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결이 났으니 법원 판결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삼권분립이 된 국가에서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 법원 판결이 잘못됐든 잘됐든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국정원 대선 불법 개입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의 결과로 결성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의 지요하 공동대표는 이번 재판 결과에 대해 “한 마디로 궤변”이라고 말했다. 지 대표는 “권력의 눈치를 보고, 논리와 법리를 끌어와 궤변을 내놓느라 고심을 얼마나 많이 했겠나” 되물으며 “머리도 좋고 공부 많이 했을 판사가 이렇게 양심이 무딜까, 측은하고 불쌍하다”고 말했다. 또 판결 내용에 대해서는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했는데, 술 마신 것만 따지고 운전한 것에 대해서는 눈 감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 지난해 9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천주교 평신도 시국기도회에 참석한 신자들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1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부근에서는 원 전 원장 판결에 항의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또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가 12일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이번 판결을 ‘궤변’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대법원에 의해 삭제되는 등 사법부 내 논란도 커지는 양상이다.

원 전 원장 재판 결과와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에 대한 천주교계의 뚜렷한 움직임은 아직까지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나승구 신부는 “아직 구체적이지 않지만 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지요하 공동대표는 “‘대선 불법부정선거’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의 이계성 공동대표는 “2심, 3심이 남아 있다”고 언급하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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