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 (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46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보물 혹은 진주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고 갖고 싶어 하는 대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은 자기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버리면서 그 하느님의 나라를 얻으려 노력한다는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그 진가(眞價)를 알면 지금까지 추구해 온 모든 가치들을 버리면서까지 그것을 얻으려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우리 안에 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질서가 지배하는 곳은, 그것이 현세든 내세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질서를 실천하여 어떤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많은 것을 바쳐 그분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높은 사람들 같이 인간이 섬겨서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지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요구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생명의 질서를 사는 사람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생명을 철저히 사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회 기득권자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생명이 살아 있는 질서, 곧 사람들을 사랑하며 용서하는 질서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 혹은 좋은 진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의 진가를 알아들은 신앙인은 그때까지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버리면서,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있고 그 함께 있음을 소중히 생각할 때 그 함께 있음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기 위해 인간으로서 정당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부부가 함께 있고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 희생은 함께 있음이 소중한 나머지 본인들이 자유롭게 택한 것입니다.

함께 있음이라는 보물 혹은 진주를 얻기 위해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많은 것을 버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과 함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모는 한 인간 개체로서 정당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많이 버렸지만 자녀와 함께 있고 자녀를 사랑하면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우리가 많은 것을 버리면서 얻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와 기쁨은 이기적인 우리의 시야(視野)를 벗어나서 하느님의 넓은 시야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물질의 소유에 내 삶의 모든 보람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평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겠다는 복수심에서 벗어나 용서하는 자유로운 마음, 대가 없이 사랑하고, 대가 없이 헌신하는 넓디넓은 마음, 이런 마음이 모두 하느님의 시야가 열어 주는 넓은 지평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질서이고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에게 허락된 풍요로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질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하듯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심판하는 질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자비로울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당신 스스로를 내주고 쏟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사실을 이렇게 해설합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라 5,1).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무상(無償)으로 베푸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애착과 환상에서 해방되고 스스로를 내주고 쏟는 질서를 살면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베풂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힘들게 또 아주 드물게 베풀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베풂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습니다. 용서도 상대에게 새로운 미래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베풂의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면 세상은 살벌하게 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들만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감사할 일도 감동할 일도 자기 스스로를 희생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 한 사람 더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더 잘되고 도로상에서 나 한 사람 더 빨리 가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만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다운 세상이 아닙니다.

베푸심은 하나의 암호와 같이 우리 삶의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 내어 실천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기심, 욕심, 경쟁심의 대상이던 것을 버리면서 비로소 그 실체와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 실체와 질서를 발견하고 영접하는 일은 나의 계획,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베푸심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숨결은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보이지도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지만 그 숨결은 우리 삶의 깊은 곳에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그 숨결을 찾아 그 숨결을 따라 흐르기 위해 돛을 달면 나도 그 숨결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우리의 베풂은 보잘 것 없지만 우리도 그 하느님 나라의 흐름에 합류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물이나 진주와 같이 숨겨져서 혹은 암호와 같이 해독(解讀)을 필요로 하는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비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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