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마지막 회)]

“황사영은 혁명주의자도 극단주의자도 아닙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백서>는 통치체제와 사회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던 조선 사회에 절망한 젊은이가 새로운 이상사회를 찾고자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대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5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황사영과 <백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마지막 공개대학이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장우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전임 연구실장)는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식’에 황사영이 빠진 것에 대해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정난주와 혼인을 한 뒤에 정씨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주교를 만났다.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교리 공부를 하다가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 일에 참여했다.

황사영은 천주교를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 ‘구원의 학문’이라고 생각해 당시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로 여겼다. 그래서 과거 응시도 포기한 채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이 박사는 “황사영이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가까이 지내며 복음을 전했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철저히 수행했다”고 말했다.

▲ 지난 5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이장우 박사가 ‘황사영과 <백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배선영 기자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체포당할 위기에 놓이자 1801년 1월 말부터 황사영은 신자들의 집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충북 제천의 배론 옹기점촌에서 큰 옹기로 덮은 토굴에 숨어 지내며 <백서>를 완성했다. 이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으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몸에 지니고 있던 <백서>도 압수됐다. 같은 해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황사영은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백서>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담은 보고서이자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서다. 신유박해가 일어난 과정과 주문모 신부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담겨 있다. 이 박사는 “<백서>를 한국 최초의 순교 전기 또는 수난기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황사영은 <백서>에 조선 교회를 다시 세우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재정적인 원조, 북경 교구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다음의 내용들을 제시했다. 그는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 외교적인 압력을 행사하도록 교황이 나서고, 조선을 청의 지방으로 만들어 감독하고 보호하라고 제안했다. 더불어 서양의 군함이 조선에 접근해서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왕에게 요구하라고 했다.

황사영은 왜 <백서>에 극단적인 내용을 담았을까

이장우 박사는 “왜 황사영이 양반이라는 사회적 특권을 버리고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서양에 무력 원조를 요청했는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사영 자신도 실현될 가능성이 적고, 정당하지 않은 계획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난을 일으키는 것보다 군대를 동원해 그저 위협만 가하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이로운 방법이라고 보았다. 이 박사는 “황사영은 조선 교회 자체적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부로부터 도움을 구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황사영이 교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백서>를 썼다”고 말하며 “한 청년이 자신이 몰두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천주교회가 대대적인 박해로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사영은 역적 또는 민족반역자일까? 아니면 순교자일까? 이 박사는 “황사영이 민족반역자인가, 또는 순교자인가 하는 이분법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그는 역적이자 민족반역자인 동시에 순교자”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사학계는 물론이고 교회 내에서도 황사영을 반민족적이며 반국가적이라고 인정한다”고 말하며 “이는 민족에 바탕을 둔 근대국가의 틀 안에 정치적인 입장을 지나치게 개입시키고, 당시의 역사적 조건을 소홀히 취급한 평가”라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황사영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사영은 ‘조선’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왕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노론 중심의 양반 지배 체제와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서양의 무력을 동원해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방법은 황사영만의 생각이 아니라 천주교 지도부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유교의 하늘’을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하늘’로 들어가고자 했고, 따라서 ‘유교의 가치를 신봉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여겼어요. 이런 점에서 황사영이 제시한 방법은 그가 꿈꾸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이었습니다.”

끝으로 이 박사는 “조선이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데 황사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신앙을 죽음으로 증거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이자 유교의 가치에 토대를 둔 왕정 체제의 조선 사회를 공화정 체제의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앞장선 역사적 의미의 순교자”라고 황사영을 평가했다.

이것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한국 천주교회사 강의 I―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공개대학 강의 내용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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