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4]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라는 바람을 밝힙니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게 해달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민족의 구원과 해방을 갈망했습니다. 모든 민족들 위의 민족으로 우뚝 설 그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들이었습니다. 필립보의 바람은 그러니까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바람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싶어 합니다. 성령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말하자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고, 귀로 듣고 싶어 합니다. 특히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시련을 겪으며 헤쳐 나가야 할 길을 찾기 어려울 때, 주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하게 청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지고 듣고 싶은 그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에 침묵하시는 경우가 많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우리의 바람은 사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 내가 겪고 있는 시련과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할 때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혹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이웃, 친구나 친지가 겪는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이는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자연스럽게 갖는 본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사적인 영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지닌 ‘사회적 본성’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사람은 나와 내 가족과 친지라는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까지 마음을 쓰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겪는 아픔에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지구 건너편에서 벌어진 불의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한테서 희망을 보기도 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열정과 희생을 아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 혹은 ‘그보다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서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에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우시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또 그들을 찾아 부지런히 길을 떠나시는 일도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보통의 사람’을 힘들게 하는 당대의 지도자들 격인 수석사제, 원로, 율법학자 같은 이들이 하는 일들을 꾸짖고 맞서시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보통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과 행적, 곧 그분께서 하신 ‘일들’에 놀라고 감탄하고, 그리고 따랐습니다. 당대의 ‘특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언짢게 보았습니다. 증오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필립보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든 것을 말끔히 해결해주시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신 ‘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꼭두각시’로 삼으려 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당신께서 떠나시더라도 남은 제자들이 더 큰 일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는” 길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리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총’의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는 영광을, 땅에는 평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물론 ‘사적’인 영역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적 · 개인적 영역 안에 갇혀 있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절호의 은총의 기회를 가둬두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가까운 이웃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생면부지의 사람을 향해, 그리고 사회를 향해 나섬으로써, 땅에 사랑과 정의의 열매(평화)를 맺으려 헌신할 때, 신앙은 풍부한 열매를 맺고 성숙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복음의 기쁨>에서 ‘복음화의 사회의 차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사람과 공동체의 신앙은 ‘사회’의 영역을 갖습니다. 이 ‘사람’의 참된 인간화와 ‘사회’의 참된 사회화를 위해 정치공동체가 존재하고, 경제활동을 하며, 문화생활을 하며, 교회는 기여합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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