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6]

▲ <삼위일체>, 루카스 크라나흐, 1551년
예비자 교리 시간에 혹은 교우들에게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냥 신비라고 하기에는 인간의 이성이 가만히 있지 않으려 하고, 그렇다고 명쾌하게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려고 하지만 아쉽습니다. 이럴 때 빗대어서 설명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있는데, 그 태양에서 빛이 나오고, 열이 나오고, 그리고 전파가 나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어떤 분은 나무라고 부르지만 그 나무에서 줄기와 잎과 열매(꽃)이 나온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은 그 이해와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를 완전한 친교와 일치, 완전한 조화와 협력이라는 ‘이상적인 관계’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적인 관계에서 ‘사회’의 본래의 모습을 끌어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셨으며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람과 사회의 완전함을 봅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는 인간 존엄함과 사회의 공동선을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존엄함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이야기했기 때문에, 오늘은 ‘시민사회’을 살펴보겠습니다. 사회는 사람의 몸과 같습니다. 몸에는 많은 부위가 있습니다. 서로 다르게 생겼습니다. 각 지체마다 하는 일도 다릅니다. 그렇다고 제각각 따로 나눠 놀 수는 없습니다. 두 다리를 쪼개서 나누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머리와 가슴을 나누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발톱을 뽑고 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에서 소중하지 않다고 여길 부위란 결코 없습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그 모든 부위가 서로 친교를 나눠야 하고, 서로 협력해야 하고,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일치해야 합니다. 이 건강함을 ‘공동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공동선이 훼손되면 몸 전체가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심하면 아예 몸이 망가지고, 더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아픈 데가 많습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아파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아프게 된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몸의 특정 부분이 몸의 다른 대부분을 때리고 또 때려서 곳곳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아프다고 그러는데도, 그 원인을 찾아 고치려 하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때리지 못하게 하지는 않고, 오히려 신음소리 내지 말라고 입을 막습니다. 그때그때 임시변통의 진통제만 먹이면서, 아프지 않다고 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런 증세를 양극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사회가 주는 기회와 혜택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사회의 건강을 위해 짊어져야 할 부담과 책임은 최소한으로 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가 줄 수 있는 기회와 혜택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박탈당하고, 대신 짊어져야 할 부담과 책임은 갈수록 무거워져서 안 아픈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모든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책임에도 경중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회가 줄 수 있는 혜택과 기회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책임이 무거워야 합니다. 이를 간과하고 모두의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n분의 1로 골고루 나누려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합니다. 정의란 혜택과 부담의 공정한 분배이기 때문입니다.

혜택과 부담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 그런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병이 심하면 눕게 되고, 더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늦기 전에 치유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세상에 내리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회 사이의 일치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회의 빛과 소금입니다. 하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그 경쟁에서 따라오지 못한 사람을 거추장스럽다고 내다버리는 병든 사회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처럼, 서로 사랑하여 공생하는 길을 찾는 것이 참된 삶의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둘은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거나, 그렇게 믿으라고 우리를 현혹하는 못된 지도자들이 만들려는 병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여, 그를 일으켜 세워 해방시키는 것, 이웃의 선익을 추구하는 삶이 참된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셋은 옆구리 찔러서 이웃을 벼랑으로 떨어뜨리거나 내가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서 다른 사람 못 올라오게 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믿는 병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과 공감하고 일치하고 연대하는 조화와 친교의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는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 사이의 사랑과 은총과 일치를 이루어주십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