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⑩- 열한 살 때 (1950년)

 

폭격맞은 마을 풍경,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번개처럼 나타나 폭탄똥을 싸고는 번개처럼 사라지는 쌕쌕이. 경보사이렌 소리가 나기도 전에 벌써 머리 위에 나타나, 까만 똥을 싸갈기고 쌕쌕이가 사라지고나면, 한참 있다가 여기 저기서 그 폭탄똥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지. 인민군들은 방공호에 기어들고, 얼마 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제 집 방구석에 코를 박고, 쌕쌕이가 빨리 사라지기를 빌었어.

전쟁 중에 인민군 비행기를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 미국 정찰기, B29, 쌕쌕이들이 그렇게 난리를 피워도 인민군들은 속수무책이었어. 하얗게 질려 도망치기에 바빴지.

한번은 우리집에서 가까운 철길에 뭘 실은 화물열차가 밤길을 가다가 쌕쌕이의 집중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어. 기차든 뭐든 비행기가 무서워서 꼭 밤에, 그것도 불을 끈 채 다녔는데도 쌕쌕이가 본 모양이야. 쌕쌕이가 사라지고 달려가 보니, 화물차량 한 칸이 빨갛게 달아 불꽃을 날리고 있었어, 속이 텅 빈 채로. 기관차와 다른 화물차량들은, 마치 도마뱀이 꼬리가 잘린 채 달아나듯이 화물차량 한 칸만 남겨주고 내뺐나 봐. 뜨거워서 물론 그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 무서웠지만, 캄캄한 밤에 그 주위를 화려하게 밝혀주는 새빨간 화물열차가 장관이기도 했어. 이튿날 아침에 가 보니, 푸릇푸릇한 회색 화물차량 쇠 껍질에 하얀 딱지들이 앉아있었어. 그 다음날 가보니, 어디로 끌고갔는지 없어졌더군.

모르긴 해도, 6ㆍ25전쟁 때 겪은 인민군의 설움 중에 비행기 없는 설움이 가장 컸을 거야. 어린 내가 봐도, 인민군들이 하얗게 질려 쩔쩔매며 도망만 다니는 꼴이 불쌍했다니까.

쌕쌕이 소리, 기관총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가 사라지면, 나는 곧바로 빈 세숫대야나 물뿌리개를 들고 집 옆 제방을 넘어 냇가에 갔어. 1961년 영주 수해로 지금은 없어진 하천이지. 역시 지금은 없어진 영주천으로 흘러드는 그 내는, 가물 때는 물이 거의 없고 군데군데 물웅덩이만 있었어. 요란한 쌕쌕이ㆍ기관총ㆍ폭탄소리의 충격으로, 공기주머니인 부레가 터져 허옇게 배를 드러낸, 손바닥만한 붕어들을 줍기 위해서였지. 붕어를 잡는 게 아니라, 웅덩이에서 붕어를 그저 줍는 거였다구. 어떤 때는 한 대야 가득 줍기도 해서 양식에 보태기도 했는데, 물론 영양식으로였지.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는 쌕쌕이와 인민군의 엄한 단속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마을을 크게 벗어나 놀 수는 없었어. 한때는 인민군이 피난 못 간 집 아이들과 우리처럼 피난 가다가 되돌아온 집 아이들을 어느 집에 모이도록 했는데, 열대여섯 명이 되었을까! 우릴 무슨 소년단이라 하고, 흰 바탕에 빨간 띠를 두른 완장 하나씩을 나눠줬지. 우린 그걸 팔에 차고 우쭐거리며 다니기도 했다구.

인민군은 우리 아이들에게 광고그림(포스터)을 보여주면서, 이제 곧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을 열심히 가르쳤어. 광고그림 중에는, 원숭이를 그려놓고 그 몸뚱이에 ‘이승만’이라고 쓴 것도 있고, 미국국기 모양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코 큰 사나이들이 인민군에 쫓겨 도망가다가 부산 앞바다에 투신자살하는 그림도 있었지. 우리 아이들은 이런 그림들을 갖고 읍내를 돌며 거리에 붙이기도 했는데, 좀 유치한 것도 같고 좀 부끄럽기도 했어. 또 노래를 가르쳐 함께 부르게 했는데, 다른 노래는 다 잊었지만, 매일 저녁무렵 무슨 의식처럼 그 집 마루에 서서 합창했던 노래는 한 소절 기억나는데,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김일성장군’, 뭐 이런 노래였지.

우리 소년단은 이틀 동안 읍내 누에고치공장인가에 있던 ‘인민군 부상병수용소’에 봉사(!)하러 갔어. 부상병들에게 밥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밥이래야 아이 주먹만한 주먹밥과 작은 깍두기만한 말고기 한 토막이었지. 신음소리, 살 썩는 냄새가 진동했어. 다리 잘린 사람, 팔 잘린 사람, 머리 터진 사람, 배 터진 사람들이 상처소독도 못하고 찢어진 인민군옷으로만 싸맨 채 괴로워하던 모습들! 뼈만 앙상한 병사들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두 입 베어먹으면 없을 그 주먹밥과 말고기 깍두기를 허겁지겁 먹던 모습들! 도대체 소독약ㆍ붕대 준비도 없이 전쟁을 시작하다니! 나는 주먹밥을 나누어주면서 토하고 싶었고 울고 싶었어. 나중 생각이지만, ‘사상’보다 잔인한 게 없고, ’전쟁‘보다 비참한 게 없어.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가끔가끔 이 인민군 부상병수용소가 기억나는데, 그러면 또 토하고 싶고 울고 싶은 기분이 돼. 불쌍한 희생자들!...... 

커다란 B29 비행기는 높이 날아가면서 뚝 뚝 폭탄똥을 누고 가지만, 쌕쌕이는 대개 네 마리가 나타나, 동서남북에서 번갈아가며 공격대상 가까이까지 곤두박질치다가, 갑자기 솟아오르면서 뿌지직 폭탄똥을 싸는 식이었지.

폭탄똥이라니, 표현이 재미있어요, 할아버지!

그때 너도 봤으면 그렇게 느꼈을 거야. 비행기 꽁무니에서 나오는 폭탄이 꼭 그렇게 보였거든.

어느 날 대낮이었어. 또 쌕쌕이 몇 마리가 나타나 우리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한 거야. 온 마을이 집들이 그리고 우리 가슴이 요동을 쳤어. 그날 우리 가족은 죽는 줄 알았지. 방구석에 코를 박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어. 얼마나 무서웠던지! 따르륵 따르륵 꽝-, 방바닥도 흔들흔들 집도 흔들흔들. 폭탄이 우리집에 떨어졌구나 싶었어.

쌕쌕이가 사라진 후, 우리 가족은 아직도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지. 정신을 차리자 집 옆 제방에 올라가 보니, 우리집에서 직선거리로 100미터쯤 되는 백사장에, 어른 키만하고 어른 몸집의 두 배쯤 되는 폭탄이 누워있었어. 어른들이 수군거리더군. 그 옆에 있던 안동으로 빠지는 다리를 끊어버리려다가, 그 폭탄이 제대로 떨어지지 못하고 경사진 제방 돌출대에 비스듬히 떨어져 불발했다는 거야. 터지지 못한 거지. 만일 그게 제대로 터졌다면, 우리 마을 특히 그 다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집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하더군. 또 한번 죽을 뻔했지. 나로서는 두번 째로 죽음이 연기된 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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