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행동, 세월호 희생자와 이웃을 위한 참회 미사 강론 전문

▲ 현우석 신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오늘까지 이렇게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마음이 가라앉았다 싶었는데, 오늘 희생자의 오빠가 쓴 글을 읽고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 말씀을 믿으며 오늘 강론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루카 4,16-20)

여러분이 들으신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출사표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역할과 일이 무엇인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통해 알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말씀을 읽을 때, 먼저 단순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자로 살아오면서 참으로 다양한 복음 말씀에 대한 해석을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해석들이 풍성하고 풍요로운 믿음 생활의 기반을 마련해줍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 말씀의 핵심을 가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혹은 받아들이기 쉬운 가르침이 분명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설교자라고 하는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봅시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앞 못 보는 이를 보게 하고, 억눌린 이들을 풀어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당시 나자렛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이라고 언급했을 때, 먼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했을까요? ‘억눌린 사람’이라 했을 때 ‘깊은 상처로 인해 마음이 억눌린 사람’이라고 이해했을까요? 봐도 보지 못 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앞 못 보는 이들을 보게 하실 거라고 하셨을까요?

아니죠. 예수님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먼저 찾아나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렇다고 직접 말씀하셨고, 공생활 내내 그 말씀을 뒷받침하는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에게 길 잃은 양이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 몸이 아픈 사람들, 힘이 약해 억눌리며 사는 사람들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였습니다.

▲ 4월 30일 저녁,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을 위한 참회의 미사’가 6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정현진 기자

그렇다면 여기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행복 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들 가운데에 이미 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적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 가난한 이, 힘 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일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와 구조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황망해 했습니다. 기성언론은 정부의 앵무새가 되어 오보에 오보를 거듭했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국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곧이곧대로 보도하는 언론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실이, 아니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드러나는 추악하고 초라한 대한민국의 민낯이 말입니다. 생때같은 아이들과 승객들을 죽인 건 ‘돈’ 때문이었습니다. 생명보다 돈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들어가는 비용은 줄일 대로 줄이고 이익은 늘릴 대로 늘리려다 이 꼴이 났습니다.

구조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태 역시 사고 발생 원인의 추악함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오늘 들은 소식인데, 해경이 언딘의 잠수부를 투입하기 위해 해군 UDT의 구조 행위를 막았다고 합니다. 언딘의 소유 지분 중 30%가 정부라지요? 정말 알면 알수록 더러운 돈의 사슬이 생명 구조를 막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정말 화가 나고 속이 터집니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간 게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고 있는 분노는 사실 정당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총책임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나라의 책임자인 박 대통령도 책임을 져야합니다. 진정한 사과가 아닌 뒤늦은, 어쩔 수 없이 내놓은 거 같은 사과만 하지 말고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

▲ 4월 30일 저녁,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을 위한 참회의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기도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이번 참사에 대해 법륜 스님은 직업의식, 책임의식을 말씀하십니다. 국민들이 개인적 심성은 좋은데 직업윤리의식이 떨어진다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오면 교통법규 덜 지킵니다. 여기저기서 법규 안 지키면 외국인들도 별 수 없나 봅니다. 게다가 위에서부터 책임 안 지고 자기 잇속만 챙기면 어떻겠습니까. 그 여파는 말할 필요 없겠습니다. 그 사회는 ‘책임지면 내 손해’라는 구호가 가장 앞설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려 할까요?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분노합니다. 우왕좌왕하는 지휘체계를 손도 대지 않은 무책임함과 국민의 아픔을 감싸줄 줄 모르는 저 차디찬 가슴에 속이 아픕니다. 현장에서는 조직 이기주의와 제 잇속 차리기가 생명 구조보다도 더 중요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순간 멍해지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느끼는 미안함은 영 줄어들 줄을 모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이들은 단지 수학여행을 가고 있었을 뿐인데, 더 많이 구할 수 있었는데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한 책임은 다 큰 어른들이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이 결국 돈 때문에 이런 참사를 초래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에게도 돈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생명보다도 소중합니까?”

이 질문은 죽어간 아이들과 승객들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 참사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꼭 기억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70~80년대 시절로 후퇴하는 걸 보면서도 국민들은, 시민들은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미사를 매일 같이 봉헌하는 것은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조선일보는 몇 년 전에 이런 기획기사를 냈습니다. 한국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분석했는데 제가 보기엔 지금의 한국 사회를 가장 적확하게 진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물욕에 의한 피로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돈과 재물을 추구하느라 한국인은 이제 지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 자신이 휩쓸리고 있는 돈과 재물의 집착으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생명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다시금 잊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우석 신부 (스테파노)
의정부교구 5-7지구 병원사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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