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마지막 회)

“16 열 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시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오 28,16-20)

유다를 제외한 11 제자가 등장한다. 역사의 예수가 활약하던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본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의 예수와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부활한 예수를 보았으니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고난의 현장으로 가라는 부탁이다. 시나이산, 호렙산처럼 하느님이 나타나는 장소인 산에서 예수가 나타난다. 예수의 신성(神性)을 말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의심은 예수의 부탁으로 빛이 바랜다. 예수 품안에 있으면 신앙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의심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교훈이다. 의심은 믿음의 기초요 디딤돌이다. 의심은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몸부림이다. 의심을 부정적으로 여길 필요는 전혀 없다.

세례가 어디서 유래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약성서 여기저기에 모든 사람이 세례 받았다고 전제하고 있다. 부활절 이후 세례자 요한의 일부 제자들이 초대 공동체에 합류하게 되고 그들이 세례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서 행해진 세례의식을 증언하는 것 같다.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바울이 비로소 시작한 것은 아니다. 바울 이전에도 예수 제자들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갔다. 안티오키아, 로마 공동체는 바울의 도움 없이 이미 생겨났다. 사마리아, 시리아에서도 예수의 제자들이 벌써 활동하였다.

모든 민족에게 가라는 말을 교회 밖으로 나가라는 말과 연결하고 싶다. 예수의 제자를 만들고 세례를 베풀라는 부탁은 신도 수를 늘리라는 말과 똑같지는 않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 말을 지키지 않으면 교회도 이방인이 되고 만다. 교회 안은 이미 복음화가 되었는데 교회 밖은 아직 복음화 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가 부닥친 커다란 문제는 바로 교회 안이 아직 복음화가 덜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복음을 거부하거나 복음과 반대로 처신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교회 밖 선교도 중요하지만 교회 안 선교가 더 시급하다. 지금 그리스도교와 예수 사이에 거리가 너무나 멀다.

어느 저자나 책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특히 신경을 쓴다. 마태오복음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책’ 으로 시작되었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겠습니다.’ 로 끝난다. 예수는 탄생 때부터 구세주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고 세상 끝날까지 인류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예수는 인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우리 시대는 하느님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은 지금 우리 곁에 계시고 언제나 그러실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시니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랴.

역사의 예수에서 출발하여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자는 것이 마태오의 의도였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역사의 예수를 뒤돌아보며 쓴 책이 바로 4복음서다. 성서는 관찰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쓴 책이다. 성서는 역사다큐가 아니고 신앙다큐다. 출발은 역사의 예수요 도착은 부활한 그리스도다. 역사의 예수와 부활한 그리스도는 같은 분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수는 지금 부활한 그리스도로서 우리 곁에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성체 안에, 성서에,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 예수의 인성에서 시작하여 예수의 신성에 이른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둘 다 온전히 존중된다. 내 성서해설도 마태오와 같은 방향과 의도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이번 계기에 마태오와 더 친해지고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마태오가 마치 동료 성서학자처럼 느껴진다.

슈낙켄부르크(Schnackenburg)의 ‘복음서의 예수그리스도’ 우리말 번역본 추천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간에 괴리를 조장하는 책들로 혼란을 겪는 이들이 이 책을 통해 균형 잡힌 모습의 예수를 만나 견고한 신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정 추기경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그가 염려하는 종류의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없다. 읽을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책 때문에 한국의 어느 신자가 혼란을 겪는다는 말인가. 직접적인 정치개입을 하는 사제가 전혀 없는데도 ‘직접적인 정치개입은 안 된다’고 설교하는 염수정 추기경의 수법과 어쩌면 그리 똑같을까.

마태오에는 가르치는 예수와 행동하는 예수 두 모습이 마치 예수 인성과 신성처럼 나란히 보인다. 예수는 가르치면서 행동하고 행동으로 가르친다. 가르침과 행동이 분열되면 예수 인성과 신성이 분열되는 것처럼 잘못이다. 가르침 없는 행동은 맹목적이고, 행동 없는 가르침은 무의미하다. 가르침과 행동의 편차를 줄이도록 누구나 애써야 하겠다. 신앙인도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서 행동에 나서라. 그리스도교는 해석하는 종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종교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종교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태오복음은 ‘행동은 가르침보다 우선이다’로 압축될 수 있다. ‘가르치는 스승 예수’도 중요하지만 ‘행동하는 예수’는 더 중요하다. 예수에게 배워서 예수처럼 행동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내 마태오복음 해설서의 체목은 ‘행동하는 예수’로 정했다. 마르코복음의 ‘슬픈 예수’는 마태오복음에서 ‘행동하는 예수’가 되었다. 지금은 행동할 때다.

마태오복음에서도 마르코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게 저항하다 정치범으로 처형당했다. 마르코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의 소제목은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다. 마태오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의 소제목은 ‘악의 세력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경고’이다. ‘예수처럼 살면 너희들도 예수처럼 당해! 라고 악의 세력은 우리를 협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를 위해 악의 세력에게 저항하고 싸울 것이다. 악의 세력은 돈과 총칼을 믿지만 우리는 진실과 하느님을 믿는다.

마태오는 친절한 여행 안내자처럼 우리에게 예수를 소개하였다. 예수를 따라서 예수와 같이 멋진 여행을 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가난한 사람들과 제자들과 같이 우리도 곁에서 지켜본 것이다. 구경 한번 잘 했다. 이제 예수를 알고 보았으니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를 존경만 하고 멀리서 지켜만 볼 것인가. 예수를 내 삶의 중요한 스승으로 따를 것인가. 선택과 결단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 태도가 우리 삶과 세상을 바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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