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스라엘 성지 순례기

▲ 사해 부근의 도로 ⓒ조현철

2월 25일 (첫째 날)

밴 구리온 공항에 거의 정시에 도착, 공항 근처의 숙소로 이동한다. 어둠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거리는 단정한 모습이다. 꽤 잘 사네, 그런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생각이 미치자 곧 빛이 바래버린다. 이들이 이렇게 살게 되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정들었던 자기들 땅에서 쫓겨나고, 가족과 공동체가 파괴되고, 죽어들 갔을까? 이게 과거의 일도, 현재완료의 일도 아니라, 바로 현재진행형이라는 현실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2월 26일 (둘째 날)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 4,14)

이스라엘에 왔다. 이를테면 내 신앙의 정신적, 물리적 뿌리에 온 셈이다. 원천에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냉철하게, 그래서 겸손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때. 오늘 미사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의 일깨움이 다가온다. 내 믿음의 원천을 둘러보는 때라 그런가,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 줄기 연기!” 피어올랐다가 한순간 사라져 버리고 마는 연기.

하지만 그런 연기 같은 존재라는 인식은 나를 겸허하게 만들지언정 나를 무력하거나 나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에 대한 엄정한 인식은 나를 똑바로 세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주어진 조건,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다가 한 줄기 연기로 사라져버릴 수 있는 용기를 준다.

2월 27일 (셋째 날)

이스라엘 순례는 왜 왔을까? 새삼 물어본다. 단순한 호기심? 호기심 때문이라면, 굳이 순례까지 올 필요는 없을게다. 호기심 채우기에야 한국에서 인터넷이나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나을 터.

예수께서 태어나고, 자라고, 일했던 곳,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가르치고 논쟁했던 곳, 당시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꼈던 곳, 그래서 분노하고, 저항하고,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어갔던 곳! 무덤에 묻혔던 곳!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2천년이 넘게 이야기가 계속되는 곳! 바로 이스라엘이다. 아니, 팔레스타인 땅이다. 고난의 땅!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예수가 살았던 역사적 현장에 나를 온전히 놓음으로써 온몸과 마음으로 예수를 알기 위함일 게다. 그래서 예수를 더 잘 따르기 위함일 게다. 역사적 예수에서 신앙의 그리스도를 길러내는 게다.

오늘 미사에서 들은 예수의 말씀은 상당히 혹독하고, 단호하다(마르 9,41-50).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럴 때 우리가 흔히 보이는 반응은 회피다. ‘에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을라고. 인자하신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지.’ 듣기 거북한 말씀은 이렇게 우리 마음에서 지워진다. 하지만 이는 내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일 뿐이다. 이는 타협이다. 좀 더 진지하게 예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왜 이렇게 혹독하고 단호한 말씀을 했을까? 예수는 “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아마 “죄”의 성격 때문이 아닐까? 죄는 하느님과의 철저한 단절, 곧 우리의 파멸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하여, 예수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나 타협도 없다. 손이 그러냐? 잘라 버려라! 발이 그러냐? 잘라 버려라. 눈이 그러냐? 빼 던져 버려라!

예수가 말씀하시는 죄의 내용은 무엇일까? 오늘 미사 독서인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바로 탐욕이다(야고 5,1-6).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살려고 아우성쳐야만 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탐욕이다. ‘그래도 설마 나는 탐욕까지는 아닐 거야.’ 하지만 오늘날 탐욕에 대한 성찰은 개인적인 차원만으로는 턱 없이 모자란다. 우리는 탐욕이, 착취가 거대한 규모로 제도화된, 합법화된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빌리면, 이런 현실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이 현실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우는 법을 잊어버리게 하는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오늘 우리는 아무도 야고보서의 질타, 예수의 경고에서 예외일 수 없다. 상당히 불편한, 이 같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 아마도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가 아닐까?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 지역에 세워진 콘크리트 벽 ⓒ조현철

2월 28일 (넷째 날)

이스라엘에서 금요일인 오늘 저녁부터 안식일에 들어간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요즘의 모습을 가이드로부터 들었다. 일단, 안식일에는 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란다. 예를 들어, 집에서는 화장실에서 쓸 두루마리 휴지를 미리 끊어놓는다. 일 보고 나서 휴지 떼는 ‘일’을 하지 않도록. 아파트 같은 건물에는 안식일용 승강기가 따로 있다고 한다. 이 승강기는 타고 나면 가장 꼭대기까지 바로 올라간다, 멈추는 층 없이. 이제 내려오면서 자동으로 매 층마다 서고, 내릴 사람이 내린다, 자기 층을 누르는 ‘일’을 하지 않고서. 대중교통이 없는 건 당연하다. 뭐, 대충 이런 정도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게,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참 희한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헌데, 예수도 이런 유대 종교전통에서 나온 분 아닌가? 하니, 역사적 예수, 실제의 예수를 더 안다고, 그만큼 더 나와 ‘예수’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생길 거라는 생각은 완전 착각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더 클 게다. 얼마나 낯선 인물이 거기 서 있을까. 게다가 무려 이천년 전에 살았으니.

헌데, 유대 전통에서 나온 예수가 근본적인 어떤 점들에서는 유대 전통을 무시하면서, 여기에 맞섰다. 이는 예수 자신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에서 비롯된 셈인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안식일에 대한 태도! 지금도 이렇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는데,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그러니 그들의 눈에, 안식일에도 병자를 돌본다고 분주한 예수가 어떻게 보였을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안식일 규정 준수만을 외치며, 생계 때문에 이를 지키지 못하거나, 아픈 사람을 방치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이렇게 반박하고 질타하는 예수, 이들이 예수에게 적의를 쌓아간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예수는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민 때문에.

예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추구하고 관철하고자 했던 가치, 삶의 방식, 이것을 나의 가치, 내 삶의 방식으로 삼는 것! 이것만이 그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나를 맺어주는 유일한 길 아닐까? 그 외에 도대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는 나의 주님”이라고? 그건 정녕 착각일 뿐이다.

3월 1일 (다섯째 날)

아침,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려고 배를 탔다. “저거 일장기 아냐?” 누군가의 말에 쳐다보니, 선원이 웬 국기 하나를 급히 내리고는 다른 것으로 바꿔 올린다. 보니, 태극기다. 아, 손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그 나라 국기를 거는데,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착각한 거다. 이제 태극기가 올라가고, 놀랍게도 애국가까지 울려 퍼진다. 어쨌든 오늘, 삼일절인데, 일장기를 잠시 달았다가 끌어내리고, 태극기가 올라갔다는 데에 나름대로 의미는 부여할 수 있겠다.

일행 중 몇 분이 일어서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한다. 갑자기, 예전의 ‘국기에 대한 맹세’가 생각났다. 좋은 마음으로 하셨겠지만,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애국심, 따지고 보면 마냥 찬양만 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과거에 ‘애국심’이나 ‘애국’이란 이름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보면, 우리나라도 그렇고, 여기 이스라엘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강요하는 데에는 대개(아니, 필시) 꿍꿍이속이 있는 법이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고통을 받고 있는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도 애국, 애국심이다. 애국 앞에서는 옳고 그른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된다. 애국이란 국익과 동의어가 되었다. 국익이라면,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옳고 그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익이라고? 그럼, 옳은 거야!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자칭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리스도를 따른다면서 말이다. 반공(요즘에는 아마 ‘종북 타도’ 정도가 되겠다!)이든 신자유주의든 특정 이념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국익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발휘할 것을 강조, 강요하면서 그 이념을 주입시키려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특히 아이들에게.

예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으라고 당부하신 것은 무엇이었나? 국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였다. 하느님 나라는 그 어떤 이념보다도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건 정의가 아니던가? 평화가 아니던가? 생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애국이나 국익이 교회 안에서도 상석을 차지하게 되었을까? 당연하게 되었을까? 예수 공생활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면서 드는 씁쓸함, 답답함이다.

▲ 갈릴래아 호수의 낙조 ⓒ조현철

3월 2일 (여섯째 날)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지역의 하나인 예리코에 들어왔다. 오늘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고, 들어오지 않는단다. 사막의 모래 바람으로 사방이 희뿌옇다.

예리코의 고대 도시 터를 방문하고 주차장으로 왔다. 옆에 있는 버스 속에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팔레스타인 여학생들이 약간은 수줍지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설마 나에게 하는 인사인가? 확신을 못해 애매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혹시나 하며 뒤를 돌아보니, 뒤쪽의 버스에도 여학생들이 잔뜩 타고 있다. 그럼, 그렇지. 자기들끼리 인사하는구먼. 쑥스러워서 얼른 버스에 타려고 하는데, 야들이 더 환하게 웃으며, 더 크게 손을 흔든다. 다시 보니, 정말 내게, 우리 일행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천진한 웃음과 손짓인지. 히잡을 쓴 아이, 안 쓴 아이, 모두 다 예쁘구나, 정말 예쁘다. 그렇게 천진하고 순박한 아이들, 그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 부모들이 겪고 있는 현재……. 그만 우울해졌다. 그렇게 아이들은 서럽도록 예뻤다.

호텔에 너무 일찍 들어 시간이 남는다. 시내로 들어갈 생각은 포기하고, 호텔 건너편 동네 카페에 갔다, 가이드와 함께. 와인을 한 병 주문하는데, 저기 ‘물담배’가 보인다. 예전, 이집트를 혼자 여행할 때, 매일 저녁 일과처럼 즐겼던 물담배! 하나 주문했다, 니코틴 없는 걸로. 와인과 물담배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든다. 계산을 하고 호텔 정문 앞에 왔을 때, 저쪽에서 허겁지겁 우리에게 달려오는 카페 청년. 물담배 값을 받지 않았으니, 달라고 한다. 헌데, 그걸 말하면서 얼마나 어색해하는지, 수줍어하는지. 청년의 순박함에 팔레스타인의 현실이 겹쳐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우울해진, 예리코의 저녁이었다.

3월 3일 (일곱째 날)

사해 근처, 꿈란 지역을 거처, 사해 체험(둥둥 뜨는!)을 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도중에 마주치는 도시, 마을 중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었고, 그 입구에는 예외 없이 큼지막한 붉은 글씨의 경고판이 서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스라엘 사람 출입금지, 들어가면 생명 위험, 들어가는 것은 불법!” 그런 지역의 국도변에는 기관단총을 소지한 사복, 군복의 이스라엘인들이 두세 명씩 서 있다.

이 지역의 긴장을 엿볼 수 있었던 장면 하나. 마을에서 국도로 나오는 화물차를 막아선 이스라엘 군인들. 뒤에는 탱크가 버티고 있다. 무언가 의심쩍은 것을 발견했는지 군인 하나가 화물차 문을 발로 걷어차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아마 나오라는 뜻이겠지. 버스로 이동 중이라 더는 보지 못하였지만, 긴장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국도 바로 뒤의 이면도로에서는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학생들이 정답게 걸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언제 찢겨버릴지 모를,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안타까운 정겨운 모습들. 이를 뒤로 한 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수가 고통 받고 죽어간 곳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애통해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지.

3월 4일 (여덟째 날)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 이제 예루살렘 순례에 들어간단다. 인근의 베들레헴까지 포함해 생각하면, 예수의 성탄 그리고 수난과 죽음이 몰려 있는 곳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핵심 중의 핵심인 장소라 하겠다. 설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난 어째 무덤덤하다.

일정상,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으로 먼저 간단다. 베들레헴, 현재 팔레스타인 구역이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우리를 가장 먼저 환영한 것은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벽이었다. 몇 년 전,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을 없애버린다고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지역에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엄청난 콘크리트 벽을 쳐버렸다. 그리곤 체크 포인트라 불리는 검문소를 설치해놓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제한다. 어떨 때는 아예 막아버린다. 그러면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꼴이 되어버린다. 가자 지구는 훨씬 심하겠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지역에서 노동을 해서 먹고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 출입을 막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줄을 죄는 격이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 지역에 세워진 콘크리트 벽. “To exist is to resist(살아남는 것이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쓴 그라피티가 눈에 띈다. ⓒ조현철

들어갈 때와는 달리, 베들레헴을 나갈 때는 검문소에서 까다롭게 차량과 사람들을 검문한다. 우리야 성지순례온 한국 사람들이라 하니 그냥 보내주었지만. 검문 때문에 차량의 흐름이 정체되고, 덕분에 장벽에 그려 놓은 그라피티들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조금 낯익은 글귀가 눈에 띈다. “To exist is to resist!”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참함과 비장함이 배어 있는 그라피티가 거대한 장벽을 수놓고 있다.

이스라엘에 오기 전, 팔레스타인에 관한 자료를 하나 구해 보았다. “오, 팔레스타인!” 두 권짜리 만화. 거기서 이 글귀를 처음 보았다. “살아남는 것이 저항하는 것이다.” 눈을 떼지 못하고, 이 글귀에 한참을 머물렀었다. 홀로코스트는 도대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말문이 막힌다. 더는 당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저항의 수단이란 그저 존재하는 것, 살아남는 것 밖에는 없다. 힘으로는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베들레헴,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하지만 기쁜 곳만은 아니다. 당시의 권력자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이 “유다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경배하러 온 것을 알고는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된다며 인근의 모든 아기들을 도륙해버렸다(마태 2).

아기들이 막강한 권력의 폭력 앞에서 그냥 죽어갈 수밖에 없었듯이, 분쟁이 일어나면 팔레스타인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힘의 불균형 속에서 대체 저항의 수단이 무엇이겠는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 그것이 저항이다. 살아남는다면, 아이들은 계속 자라날 것이고, 그렇게 저항은 이어질 것이다. “아, 그대들, 기필코 살아남으시라!”

팔레스타인 구역의 아이들, 너무도 예쁘고 천진난만하다. 이스라엘 구역의 아이들도 너무 예쁘고 천진난만하다. 모두 똑같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세상, 참으로 잔인하고 끔찍하구나.

3월 5~6일 (아홉째, 열째 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유적지, 예루살렘 순례를 시작했다. 복잡하고 어수선해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고 정신도 없지만, 하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탁자와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되어버린 것에 분노하며(마르 11,15-17).

설명이 잘 기억나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가령 이런 거다. 정교회 관할인 베들레헴의 어느 성당. 가톨릭에서 거기에 성탄을 기념하여 ‘별’을 하나 붙였다고 한다, 허락도 없이. 화가 난 정교회 신부들이 그 별을 떼어버렸다. 가톨릭에서는 다시 붙여놓지 않으면 자기들 편을 드는 국가들에게 일러 혼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겨서 좋기도 하겠다. 참 한심한 노릇이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 교회와 예수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상봉 기자

예루살렘 성전 구역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무슬림, 아르메니아 교회가 나누어 관장하고 있다. 이른바 자기들 구역이 있는 것이다. 여기를 침범하면, 글자 그대로, 조금만 넘어오면, 바로 제재가 들어온다. 천주교와 아르메니아 교회가 분할해 관장하는 성당에서 한쪽으로 카펫이 조금 넘어갔다. 칼로 바로 잘라버린단다, 아무 말도 없이. 소유와 지배에 대한 집착, 얼마나 놀라운가!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 교회와 예수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의 삶에 가장 역행하는 삶이 일어나고 있는 곳, 예수가 추구했던 가치와 가장 상반되는 가치가 우대받는 곳, 바로 ‘예루살렘’이 아닐까? 당시 예수가 질타했던 율법주의와 가치의 전도, 오늘날도 형태만 변했을 뿐 그대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는가? 더 심해진 것은 아닐까? 소유와 지배에 대한 집착이 예수의 성지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오늘 예루살렘에 오신다고 해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환영이 아니라 수난을 각오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세상에서 예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고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을 실천했으니 말이다. 예수는 내어줌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순환의 삶을 사셨고,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 소유와 지배의 세력에 저항하는 꼴이 되었고, 죽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마지막은 아니었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빵을 함께 나눈 곳,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곳, 바로 ‘엠마오’를 잊지 말아야지(루카 24,13-35). 낙담하여 떠나가는 제자들의 발길을 예루살렘으로 돌려세웠던 그 희망을 내게서, 우리에게서 길러내야지.

엠마오를 뒤로 하고 이제 한국으로 향한다. ‘오늘 한국에서 베들레헴, 갈릴래아, 예루살렘, 그리고 엠마오는 어딘가’라는 물음을 안고.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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