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64

45 낮 열두 시부터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47 거기에 서 있던 몇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48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곧 달려가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목을 축이라고 주었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시오.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태 27,45-50)

▲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1520년
예수의 죽음 장면을 4복음서 모두 다루지만 서로 조금씩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서 15,33-37을 대본으로 삼았다. 루카 · 요한 복음에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이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다른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이 초대교회에 곤란함을 주었음을 암시한다.

마태오는 45절 “어둠”에서 심판(아모 8,9; 예레 15,9), 세상 끝날(마태 24,29) 또는 하느님의 슬픔을 나타내려 했을까. 하느님의 슬픔을 말하려 한 것 같다. 아람어로 전승된 엘로이(eloi, 마르 15,34) 대신 마태오는 히브리어 엘리(eli)로 적었다(마태 27,46). 마태오의 보도가 정확하다. 그래야만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사람들이 혼동할 수 있다. 예언자 엘리야는 죽음의 위험에서 도와주고, 또한 메시아가 오기 전에 나타나는 인물로 여겨졌다.

46절 예수의 외침은 시편 22편 첫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예수의 고통은 결국 감사함으로 이어진다. “내가 괴로워 울부짖을 때 ‘귀찮다, 성가시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탄원하는 소리 들어주셨다”(시편 22,24).

군인들이 마시던 신 포도주를 예수에게 준 것은 동정이 아니라 조롱하는 뜻이다. ‘내려주다’(마르 15,36) 대신에 49절에서 ‘구해주다’로 바뀌어 예수에 대한 조롱은 더 심해졌다. 50절 예수의 죽음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발적인(propia voluntate) 죽음이라고 설명하였다. 예수 이외의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는(ex necessitate) 죽음을 맞이하는 사실과 대비된다.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고 세상을 떠났다.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가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육성은 외침이었다. 예수는 외침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46절은 유럽의 전체 영성 역사를 반영하는 근본적인 구절에 속한다. 첫 천년기에는 예수의 외침이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하느님의 아들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외쳤을까). 둘째 천년기에는 그 반대로 예수의 외침은 고통 받는 인간의 두려움 그 자체로 여겨졌다(신성을 지니신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에게 버림받을 수 있을까). 예수가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지녔다는 교리가 이에 대한 해설을 맡았다.

고대교회에서 46절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곤혹스런 구절이었다. 예수는 가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으셨다. 그리스 신학자들에게 근본적으로 신은 고통을 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고통당할 수 없는 신성을 지닌 예수의 고통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십자가에서 예수의 인성만 고통을 겪은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은 예수의 인성에서만 떠나신 것으로 해설하였다. 전체적으로 고대교회에서 예수의 외침은 당황스러움의 표현이 아니라 승리의 외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세에서 예수의 인간적 고통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예수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영성이 강조되었다(compassio). 그리스도교 분열기(종교개혁이란 단어를 나는 삼가겠다)에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은 예수의 고통은 하느님께 처벌받는 고통이라고 해설하였다. 우리 인간에게 내릴 처벌을 예수가 대신 받았다는 뜻이다.

계몽주의 이후로 예수의 두 본성 교리는 46절에 대한 해명에서 차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20세기 풍토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멀리 계시다는 생각이 유행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는 20세기 인간의 경험을 같이 한 셈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완벽히 인간 세상을 떠나셨단 말인가. 떠나버린 하느님을 십자가에서 이해하는 것은 신 개념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후대의 여러 해설 앞에서 마태오 복음서 본문의 메시지를 되돌아보자. 인간의 죄를 대신한 죽음, compassio, 현대의 많은 해설처럼 예수의 심리에 대한 분석은 오늘 본문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마태오는 예수의 죽음 장면에 하느님이 여전히 계심을 강조한다. 20세기 유럽 신학과 달리 해방신학은 십자가에서 고통 받는 예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모습을 되찾았다. 예수의 죽음에서 하느님의 떠나심을 본 유럽 신학보다는, 예수와 같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한 해방신학이 마태오의 의도에 더 가깝다. 하느님은 예수를 버리지 않으셨고 예수가 고통 받는 십자가에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고통 받는 인간을 떠나시지 않았고 인간이 고통 받는 바로 그 자리에 계신다. 하느님은 고통 받는 역사의 희생자와 함께 계심을 해방신학은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 위 예수의 외침과 죽음은 수많은 생각과 작품을 낳은 원천이 되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까. 부활의 시각에서 예수의 죽음을 볼 수도 있고, 부활에 관계없이 예수의 죽음을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예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에서 종교적 의미를 묵상하기 전에 그 정치적 맥락을 놓쳐서는 안 된다. 대부분 해설은 예수의 죽음의 정치적 맥락을 외면한 채 개인주의적 · 심리적 시각으로 그 죽음을 바라보았다. ‘예수의 죽음은 내게 무슨 의미를 줄까’ 생각하기 전에 ‘예수의 죽음은 세상의 정치범들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수의 죽음은 내 죄에 어떤 의미를 줄까’ 생각하기 전에 ‘예수의 죽음은 지금 고통 받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일까’를 먼저 생각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마태오 복음서 본문을 오늘 우리 사회에 어떻게 연결할까.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옳은 이들이 박해당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느님은 존재하시기는 하는가. 하느님은 우리 민족의 운명에 관심이 없으신가.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도록 모른 체하실 건가. 저 교활한 권력자들을 혼내지 않으시려나.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악의 세력을 돕는 종교인들을 보고만 계시려나. 사악한 종교인들이 거짓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이 역겹지 않으실까.

하느님, 우리 하느님, 어찌하여 우리 민족을 버리시나이까? 하느님, 어둠에 싸인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의로운 이들의 울부짖는 외침이 하늘에 닿나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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