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교황과 부시의 자문역


리차드 존 노이하우스 신부
미국 가톨릭 보수주의 지도자로서, 종교 단체의 테두리를 넘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보기 드문 신학자요 영성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인 리차드 존 노이하우스 신부가 72세로 사망하였다. 리차드 신부는 1월 8일 동부 시간으로 10시 직전 사망하였다. 그는 성탄절 다음날 지병으로 입원하였는데, 앓고 있던 암의 부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뉴욕 대교구의 사제이며 전 루터교회 목사였던 리차드 신부는 이른바 '종교적 권리'에 대한 지적 스승으로 세간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 초 이후 리차드 신부는 미국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두 동맹 단체를 이끌어낸 선두 주자였다. 두 단체 모두 상호 반목의 역사를 극복하였다. 보수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의 동맹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신 보수주의와 ‘신앙과 가치’ 사회 보수주의의 동맹이다.

2005년에 타임지는 이례적으로 리차드 신부를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복음주의자 25인의 명부에 포함시켰다. 2004년 종교 출판계의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이 다른 모든 권위자들 가운데서 리차드 신부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고 해설을 달았다.

부시 대통령은 “리차드 신부가 이러한 종교적 문제들을 명확히 하도록 나를 도와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리차드 신부가 유명한 것은 그의 정치 활동보다는 그의 저술 때문이다. 1990년에 창간된 지식인 잡지 <First Things>에서 리차드 신부는 계속해서 종교와 세속이라는 문제에 대한 논평을 실었다.

한 마디로 리차드 신부는 명백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지지자였으며, 그의 논평은 로마에서도 존중을 받았다. 예를 들어 요한 바오로는 1997년 리차드 신부를 아메리카 시노드의 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 권위를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교황청의 반대를 한탄하였다. 베네딕토 교황 재위 초기에 리차드 신부는 새 교황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을 단속하지 못하고 있다며 ‘불편한 마음을 명백히’ 밝혔다.

리차드 신부의 정치나 신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수년간 월간지 <First Things>에 ‘공개 광장’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그의 평론을 순수하게 문학적 재미로 탐독하였다. 그의 기지에 넘치는 문장과 때로는 날카로운 풍자는 애독자들에게 체스터톤이나 존 헨리 뉴엔 신부와 같은 시대를 넘어서는 영어권 가톨릭 지도자들을 상기시켰다.

리차드 신부가 미국 가톨릭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사실상 태생적으로는 미국인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그는 1936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루터교 목사의 8자녀 중 한 아들로 태어났다. 리차드 신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60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는 뉴욕의 넓은 흑인가를 포함하는 성 요한 루터교회에서 사목하였다.

1960년대의 격동기에 리차드 신부는 진보주의와 동일시되었다. 예수회 평화 운동가 다니엘 베리간 신부와 라비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과 더불어, 리차드 신부는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한 성직자단’을 공동 창립하였다. 리차드 신부는 우익으로 돌아선 후에도 계속해서 베리간 신부와 같은 인물들을 칭송하였다. 리차드 신부는 그들의 활동이 빗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모두 공공의 삶이 복음의 가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리차드 신부는 그가 좌익과 결별한 주 원인은 1973년 미국에서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 연방 대심원의 로 웨이드 판결이었다고 상기시키곤 하였다. 그는 공공연한 낙태 반대주의자가 되었고, 부시 행정부의 배아 줄기 세포 연구 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었다.

리차드 신부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1990년 9월 8일이었고 1년 후 뉴욕 존 오코너 추기경의 주례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당시 루터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차드 신부는 로마와 분리를 요구하는 개혁주의 시대의 논리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으며, 루터교는 넓은 시각에서 볼 때 더 이상 개혁 운동 단체가 아니고 하나의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감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리차드 신부는 루터교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일생 교회일치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 닉슨 보좌관으로 개신교 목사가 된 찰스 콜손과 함께 '함께하는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신자'를 공동 창립하였다. 이는 가톨릭 제도 교회와 주요 개신교 단체들이 나누는 공식적인 종교일치 대화에 대한 보수주의적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리차드 신부는 수년간 ‘종교와 공공 생활 협회’와 ‘종교와 민주주의 협회’와 같은 신보수주의 재단과 두뇌 집단의 책임자요 고문으로 봉직하였다. 그는 미국 가톨릭의 저명한 신보수주의 ‘3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졌다. 다른 두 사람은 평신도 가톨릭 저술가 조지 위글과 마이클 노박이다. 이 세 사람은 정치적 신학적 동지일 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들이다.

위글은 리차드 신부가 영원한 유산을 남겼다고 말했다. “리차드 신부는 존 코트니 머레이에 이어 가톨릭의 비평적 주장을 발전시키는 데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위글은 이렇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가톨릭 교회가 수락하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미국 예수회 신학자를 기리고 있다.

위글은 덧붙여 말했다, “또한 리차드 신부는 신학적 영적 저서들과 삶의 본보기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넘치는 지적 문학적 에너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보기 드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사상은 미국인의 종교 의식에 앞으로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리차드 신부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어디까지나 정치인이라기보다 신학자였다. 그의 사회적 관점에 반대하는 비평가들조차 그의 심오한 영적 신념에 대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1년에 리차드 신부는 광범위한 호응을 얻는 묵상집을 출판하였다. 제목은 <금요일 오후의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상 마지막 말씀 묵상>이다.

2009.1.8. 존 알렌

번역/김미경

<출처-N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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