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56

47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를 따라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몰려 왔다. 48 배반자는 그들과 미리 암호를 짜고, “내가 입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붙잡아라” 하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49 그는 예수께 다가와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면서 입을 맞추었다. 50 예수께서 “자, 이 사람아, 어서 할 일이나 하시오” 하고 말씀하시자 무리가 달려들어 예수를 붙잡았다. 51 그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쳐서 잘라버렸다. 52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시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 53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까? 54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한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55 하시고는 무리를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입니까? 56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마태 26,47-56)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아주 폭력적인 장면으로 4복음서에 모두 소개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대사제가 고용한 성전 경찰이 예수를 체포하러 몰려온다. 칼이라는 단어가 본문에 세 번이나 보인다(47, 51, 52절). 대본인 마르코 복음서 14,43-52와 크게 달라진 곳은 없다. 유다의 행동에 대해(50절), 제자가 칼을 쓴 것에 대해(52-54) 예수가 마르코보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한다.

예수의 말씀이 끝나기 전에 폭력이 시작되는 47절을 보면 강정마을에서 미사를 훼방하는 경찰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사에서 설교를 마치기 전에 총에 맞은 로메로 대주교 최후의 장면이 생각난다. 몇 년 전 명동성당에서 4대강 반대 농성하던 사제들이 설치한 천막을 성당 직원들이 사제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폭력으로 철거하던 사건이 떠오른다. 명동성당에서 힘으로 천막을 철거한 것은 종교권력의 힘을 과시한 것으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행동과 정반대다. 폭력을 쓰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 <예수의 체포> 세부, 프라 안젤리코, 1440년

키스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 사이뿐 아니라 왕이나 랍비 등 존경하는 분에게 소속감과 애정의 표시로서 유다 사회에 퍼져 있었다. 헤어지거나 재회할 때 인사와 기쁨의 표시로, 또는 화해의 표시로 유행하였다. 키스는 입, 손, 발에 행해졌다. 노예와 강도들 사이에서 경계 설정의 표시(boundary marker)로 키스는 행해지기도 했다. 유다인은 이방인에게 키스하지 않았다. 이집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에서 ‘거룩한 키스’는 신자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으로 행해졌다(로마 16,16; 1코린 16,20).

밤이라 예수를 다른 사람과 혼동할 수 있고, 또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48절은 암시한다. 49절에서 유다가 예수에게 쓴 호칭 “선생님”(rabbi)은 유다가 예수의 제자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마태 26,25). 예수가 유다에게 쓴 헤타이로스(hetairos)는 동료나 친구를 부를 때 쓰는 단어였다. 신약성서에서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나는 단어인데 70인역 공동성서(구약)에 27번 보인다. 이 단어를 유다에 대한 예수의 실망으로 해설하는 학자도 있었고, 유다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보는 학자도 있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려도 스승은 제자를 버리지 않는다.

50절에서 예수가 한 말(ep ho parei)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의문문으로 보면 “무엇 때문에 왔소?”로 해석된다. 초대교회와 라틴어 번역 성서 불가타(ad quid, 무엇 때문에), 그리고 20세기까지 대부분 성서에서 그렇게 번역되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찬성하기 어렵고, 유다의 배신을 예고한 예수가 그렇게 질문했을 리 없다. “그것 때문에 온 것 같으니 그대로 하시오”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서 할 일이나 하시오”라는 공동번역이 그에 가깝다. 가장 문제가 적은 번역은 “이런 목적으로 왔군요”다.

마르코 복음서 14,47에서 예수를 체포하러 온 경찰 중 한 사람이 자기 편 사람의 귀를 칼로 자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데 오늘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렇게 한 것 같다. 요한 복음에는 베드로가 그렇게 한 것으로 되었다(요한 18,10). 대사제의 종은 무리 중에 가장 중요한 지휘관이라고 그닐카는 추측한다.

방어용으로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축제 때나 안식일에도 허용되었다. 칼은 의복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55절은 저항사 장면에서 예수가 자신을 변호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유다의 키스는 배신의 키스다. 요한 복음 18,1-11에 유다의 키스 장면이 빠져 있다. 형제 야곱에게 에사우가 한 키스(창세 33,4), 아마사에게 요압이 한 키스(2사무 20,9) 같은 사례가 있다. “평화의 도구인 키스로 죽음을 만들다니” 하며 암브로시우스는 탄식하였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세 9,5-6). 그 구절에서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라는 52절 보복법이 생겨난 것 같다(ius talionis).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과 군인, 경찰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글, 말, 돈의 경우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까.

53절에서 군단은 5,600명의 군인 부대를 가리킨다. 12군단이니 약 67,000 천사를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25군단 약 14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힘을 과시하라는 악마의 유혹을 예수는 여기서 거절한 것이다(마태 4,5-7). 53절은 종말 전투에서 천사들의 개입을 기다리던 에세느파를 겨냥하는 말이다. 에세느파는 양력을 사용하여 축제를 지냈고 예루살렘 성전의 역할을 부정하였다. 음력을 사용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과월절 축제에 참여한 예수의 행적은 에세느파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 예수는 에세느파 소속이라는 <예수평전>의 저자 조철수 선생의 의견에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예수는 비폭력을 가르친다. 산상수훈 여섯째 구절을 예수는 몸소 보여준다. “앙갚음하지 마시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마태 5,39). 평화를 얻기 위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예수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폭력을 쓰는 사람들의 회개를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정치공학으로만 세상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바보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체 게바라는 예수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기 전인 1956년 말 28살의 게바라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를 따름은 고난 받는 예수와 함께 고통 받는 것이라며 본회퍼는 ‘수동적 고통’(passio passiva)이라는 표현을 썼다. 의미 깊고 새겨들을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기꺼이 적극적으로 고통에 참여하는 예수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의 예루살렘 최후의 날들을 흔히 수동적 고통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예수의 저항을 강조하고 동시에 그 고통을 온전히 새기려면 ‘적극적 고통’(passio activa)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있으며, 마태오 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 : 불의에 저항한 예수>가 최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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