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불교적 그리스도인, 예수회 서명원 신부

최근 불교계의 선승인 성철 스님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은 천주교 사제가 있어서 주목을 끌었다. 예수회 소속의 서명원 신부(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서강대 종교연구소 소장)는 지난 2004년 ‘퇴옹 성철 선사의 생애 및 전서’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프랑스 파리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철 스님 열반 2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지난 20년간 성철 스님을 연구한 결과를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퇴옹 성철 이 뭣고?>(서강대학교출판부)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성철 스님을 둘러싼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을 다루면서, 한사코 돈오돈수를 강조한 성철 스님의 입장이 “귀납적 사고와 대화를 배척하는 반공산주의에 입각해 절대적 정권을 세웠던 쿠데타들을 강하게 상기시키게끔 한다”고 전해 불교계를 비롯해 한국 사회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서명원,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퇴옹 성철 이 뭣고?>, 서강대학교출판부, 2013
서명원 신부는 “성철 스님의 공생활 기간이 독재정권의 기세가 올라가기 시작한지 몇 년 후 처음 이루어져, 그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성철 스님은 1993년 입적할 때까지 종정과 해인총림 방장을 지냈으나, 구체적인 활동은 6월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1987년 이후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서 신부는 “1988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민주주의 정신을 따르는, 즉 진리에 관한 여러 해석을 허락하는 그 경향은 한국 불교가 1960년대부터 진행해온 개혁이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결국 서명원 신부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성철 스님의 견해를 군사독재와 냉전 시대의 산물로 보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수행 방법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서명원 신부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보완적 관계로 파악하면서, 그리스도교 수행에서 불교 수행의 다양한 방법들을 참고하고 있다.

서명원 신부에 따르면, ‘단박에 깨쳐서 단박에 수행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돈오돈수와 관련해 예수는 세례를 받고 나서 기도하고 있을 때 돌연 성령을 가득히 받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공생활 내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정신으로 살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의연히 가야할 길을 걸었다고 전했다.

한편 제자들에게는 돈오점수의 길을 허락하여, 제자들이 수행 과정에서 실수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었으며, 한결같은 용서로 제자들을 스승이 얻은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다고 전했다.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그대들에게 이롭다”라고 말한 것 역시 제자들이 스승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미세한 의식에 이르기까지 내면화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해석했다.

현재 ‘천달’(天達)이라는 법명으로 ‘선도성찰나눔실천회’ 법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서명원 신부는 2011년부터 경기도 여주에서 ‘도전리 산골공동체’에서 선수행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정기적인 수행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도전리의 이 공동체를 찾아가 수행 모임을 취재하고 서명원 신부와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 서명원 신부가 이끄는 피정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서 좌선에 임한다. 미동도 허락되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상봉 기자

그리스도교도 수행종교…기도와 삶과 수행은 하나
불교 수행법,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아야

한상봉 : 그동안 가톨릭교회는 말씀과 선포, 성사의 종교로 알려져 왔으며, 최근 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그리스도교가 표피종교가 아니라 심층종교로 가려면 아시아 종교의 수행적 측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발전을 위해 ‘수행’이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 서명원 신부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중 영적 부르심을 받고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한국에 파견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상봉 기자
서명원 : ‘그리스도교가 표피종교가 아니라 심층종교로 가려면’이라는 구절은 마치 그리스도교가 심층적인 종교가 아니고 표피적인 종교일 뿐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아시아 종교를 만나지 않고서는 표피종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으므로, 질문의 표현이 부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 들어오기 이전, 그리스도교에도 수행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리스도교는 표피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칫 질문의 뜻이 나(의 종교)에게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아시아 종교의 수행법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질문에서 언급한 ‘아시아 종교의 수행적 측면’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도 않아요. 도교, 힌두교, 힌두 요가, 불교의 위파사나 및 선수행을 이야기하시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면이 있는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답변 드린다면, 다만 세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도 전통적인 수행법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학자로 인정받은 기도의 스승인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관상기도를 통해 통합된 삶에 이른 것만 보더라도 아시아 종교의 수행법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아시아 종교의 수행법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확실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해온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스도교가 아시아 문화에 최소한이나마 뿌리내리고 적응해가기 위해서는 불교의 수행법을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러 나라에서 그런 작업을 해온 몇몇 그리스도인이 있어요.

세 번째,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 또는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신비주의를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시아 종교의 수행법과의 만남이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고, 나아가 훨씬 더 깊은 그리스도적 생활을 하게끔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최근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에서 선수행 등의 아시아 종교의 수행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를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실망이 큰 나머지 그리스도교를 등지고 선수행, 또는 티베트 불교 수행법이나 위파사나식 수행을 시작하는 서양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리스도교가 불교에 뒤떨어진다고 보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요가나 선수행, 위파사나식 수행, 도교 등의 수행법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 서명원 신부의 수행은 돈오돈수 · 돈오점수를 겸하며, 간화선을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한다. ⓒ한상봉 기자

―그렇다면 가톨릭 신앙의 발전을 위해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수행(修行)이라는 말은 닦는 행위라는 뜻이죠. 기도가 수행이에요. ‘심층기도 없는 그리스도적 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층기도가 꼭 필요해요.

―심층기도가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종교의 종지(宗旨, 근본정신)를 체험(體驗)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데 있어 머리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험 또는 체인(體認), 즉 몸으로 그 종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득(體得), 몸으로 얻어야 해요. 그냥 어떤 지식을 외우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이 삶 안에서 생활화되어야 해요. 종지의 완전한 생활화를 이루는 데 심층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기도생활이 삶 전체에 두루두루 침투해야 합니다. 그건 생수불이(生修不二)의 이치예요.

―그리스도인의 수행 과정이 불교의 참선을 수용한다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자칫 자기 신앙에 대한 혼란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부정의 길,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길을 재발견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언어를 통한 긍정의 길을 걷다보면, 결국 맨 마지막에 가서는 주님의 신비를 언어화할 수 없어요. 그리고 신앙생활은 언어라기보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긍정의 길을 걷다가 부정의 길로 들어서면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엄청나게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 경우 10년 넘게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이라면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먼저 그 체험을 가진 개척자나 지도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공동체 안에서 수행을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이유가 없어요.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이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와 함께하지 않는 경우라면 힘들겠지요.

―서명원 신부님께서도 화두 과정을 겪는 동안 10년 이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시는데, 그 어려움을 겪는 동안 신부님께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더욱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기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도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자꾸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까 제가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불교를 접한 후 저는 아주 많이 달라졌어요. 아주 개방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제가 처음 저의 종교인 가톨릭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저는 신학적 · 영적인 측면에서 아주 보수적이었거든요. 닫힌 사람이었어요.

▲ 피정은 한 시간 간격으로 거듭해서 침묵 속에 좌선을 하고, 시작과 마침을 알리는 죽비 소리에 맞춰 절을 나눈다. ⓒ한상봉 기자

성경를 통한 선수행…패스트푸드 아닌 웰빙푸드
화두를 풀면서 성령 안에 사는 법…서명원 신부의 ‘성경화두과정’

―공동체에서의 수행을 중시하시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공동체에서의 수행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혼자서 수행하다 보면 여러 어려움에 처할 수 있어요. 또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유무형의 공동체, 이를테면 혈연적 ・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 종교적 차원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미 신부님께서는 지도를 하시고 계십니다만, 그리스도인이 ‘성경화두과정’을 겪을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요?

예. 제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국내에서 다른 분이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알지는 못하고요. 최소한, 제가 하고 있습니다.

―서명원 교수님께서는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사용하여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에 대한 견해를 지니신 것으로 압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간화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불교의 참선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성경화두과정’, 즉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기반한 화두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불교식 화두과정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서명원 교수님께서 만드신 ‘성경화두과정’을 체험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요?

최소한 10년입니다. 6년 전, 저와 함께 ‘성경화두과정’을 시작하신 분이 지금 75% 정도 마쳤어요. ‘다운로드(download)’의 문화, 택배의 문화, 빠른 우편의 문화와 잘 맞물리지는 못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컴퓨터 자판의 ‘엔터’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다 ‘다운’받을 수 있어요. 또 웬만한 우편물은 3일 이내에 다 받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성경화두과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에 새로 생긴 우편서비스 중에 오늘 편지를 부치면 1년 뒤에 받아 보는 ‘느림 우편’의 인기가 높다고 해요. 화두과정은 그런 ‘느림 우편’ 같은 거죠. 패스트푸드가 아닌 웰빙푸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인이 ‘성경화두과정’을 성공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선구자들과 개척자들이 계십니다. 특히 몇몇 그리스도인의 경우 간화선을 수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전통에 접목시키기 위해 수십 년 이상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일본의 예수회, 도미니코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러나 한국은 아직 이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대화가 “불교는 신 없는 수행 체계인데 어떻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면, 그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되기는 힘들어요.

그리고 제 경험상 그리스도인 100명 가운데 ‘성경화두과정’을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정도 밖에 안 될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간화선 수행을 한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이나 체험이 불자의 간화선 수행과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저 또한 10년 이상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경험 덕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으면서 화두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성경화두과정’을 만들게 되었지요.

‘성경화두과정’은 언어도단의 부정의 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 주님을 어느 정도까지만 언어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 신학의 개념으로 주님의 신비를 언어화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그리스도인을 위한 ‘성경화두과정’의 입실 과정에서 서명원 신부와 화두를 풀고 있는 참가자 ⓒ한상봉 기자

―지난달에, 제가 서명원 교수님께서 이끄시는 피정을 동행 취재할 때 보니 ‘입실’〔入室, 제자가 사승(師僧)의 방에 들어가 도(道)를 묻는 일〕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입실이 무엇인지, 그 방법과 내용을 알려주세요.

‘입실’은 스승에게 화두(話頭)를 하나 받은 다음, 1주일 동안 하루에 최소 30분씩 명상을 하고 난 뒤, 스승에게 찾아와서 화두를 풀었는지 못 풀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보통 처음부터 사람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습니다. 참선수행에 입문하시고 난 다음에 저를 만나시게 돼요. 입문을 하면 참선수행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요.

그 내용은 자세, 호흡법, 시선, 손 자세, 통증에 대처하는 방법 등의 이론적인 것이고, 보통 1~2시간이면 마쳐요. 그 후 수행에 들어가서 수식관(數息觀)을 배워요. 수식관은 숫자를 헤아리면서 들숨 날숨을 쉬는 것이고, 1~2개월 정도 수식관을 익힌 후 첫 번째 화두를 받게 돼요. 그 다음부터 화두를 풀었는지 안 풀었는지 점검받게 됩니다.

현재 저희 공동체에는 이제 막 수식관을 익히기 시작한 스위스인 초등학생이 한 명 있고, ‘성경화두과정’을 밟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불자를 위한 화두과정을 밟는 사람들이 있고, 두 가지 화두과정을 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화두과정인 ‘성경화두과정’, 불자를 위한 화두과정, 아니면 이 두 가지를 겸하는 과정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보통 과정 선택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수행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의해서 정합니다. 예를 들면, 스위스에서 온 알렉상드르 졸리앙(Alexandre Jollien)의 경우 처음에는 ‘성경화두과정’으로 시작했어요. 하지만 진행이 잘 안 됐기 때문에, 입문과정을 통해 ‘초보자를 위한 화두’ 15~16개를 받아 풀기 시작했지요. 그 화두들을 풀고 난 뒤에는 혜천(慧泉)이라는 법명을 받고, ‘무문관(無門關)’ 48칙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는데 이제 거의 마쳐가요.

―‘입실’, 즉 ‘성경화두과정’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 실제 어떤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시는지요?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죠.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 뭔가 하면, 성령의 7가지 선물(굳셈 ・ 용기, 의견 ・ 식별 ・ 정의, 두려움 ・ 경외, 효경, 지식, 통달 ・ 통찰, 슬기 ・ 지혜)을 받고, 성령님이 맺게 하는 9가지 열매(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를 맺는 거죠.

▲ 피정을 마치는 파견미사에서는 고요함과 함께 바치는 성가, 독서, 복음으로 깊은 울림이 전달된다. ⓒ한상봉 기자

―‘성경화두과정’을 밟는 그리스도인들과 ‘성경화두과정’을 밟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서의 생활에 대한 개념 설정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자주 봅니다. 그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걸 잘 알지 못합니다. 대체로 가톨릭 신학은 그리스도론을 많이 강조하는 한편 성령론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아요.

예를 들자면 불교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할 때, ‘색’과 ‘공’을 많이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색과 공 사이에 있는 ‘즉(卽)’ 또는 ‘즉시(卽是)’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할 때 ‘색’과 ‘공’만 이야기하고, ‘즉’ 또는 ‘즉시’는 많이들 잊어버려요. 공이면서 색이고, 색이면서 공이거든요.

이 말씀은 곧 색과 공의 연결고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보통은 이런 생각을 하지도 않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필수불가결한 연결고리인 성령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색’과 ‘공’을 그리스도교의 개념에서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리스도교의 개념에서, ‘공’은 하느님, ‘색’은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공과 색이 똑같지는 않아요.

▲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동안, 사제와 참석자들은 구별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 ⓒ한상봉 기자

불교 없이 못 사는 불교적 그리스도인
“불교 덕택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깊은 관계 맺을 수 있어”

―신부님을 ‘불교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예. 괜찮아요. 저는 불교 없이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적 그리스도인’이라는 데 동의하시는지요?

불교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불교 덕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영원토록 불교와 살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싯다르타 고타마를 사귀어라. 석가세존을 사귀어라. 배울 것이 많다”, 그리고 싯다르타 고타마께서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 스승이다. 나에게 많이 배웠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싯다르타 고타마에게 배울 것이 더 있을 것 같으니 또 방문하러 가라”고 하셔서, 불교를 배웠더니 싯다르타 고타마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본래 스승께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넘나드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오는 3월부터 서울 마포구 예수회센터에서 강의하시는 ‘그리스도님과 부처님의 만남을 통한 비움의 영성생활’은 어떤 프로그램인지 설명해주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불교와 건강하게 사귀면서도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적인 주님과의 합일, 즉 성령과 일치된 생활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강의입니다. 2년 과정으로 진행되고, 매주 화요일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합니다. 학기별 주제는 ‘한국불교의 돈점(頓漸)과 공관복음: 깨달은 자로서의 예수’, ‘코헬렛(전도서)과 금강경: 불교의 지혜와 그리스도교의 지혜’, ‘선불교와 아가서: 공(空)사상과 주님과의 합일 여정’, ‘루카복음의 무문관(無門關): 그리스도인을 위한 간화선(看話禪)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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