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HIV 감염인 인권활동가 윤 가브리엘 씨

‘가브리엘’은 그의 세례명이다. 2002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으면서 그가 직접 선택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라는 의미가 좋았다고 했다. 자신 또한 차별받는 HIV 감염인들의 고통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신저가 되고 싶은 마음도 담겨있다 했다.

윤 가브리엘 씨는 2000년 봄, 자신이 HIV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계속 아픈데 원인을 모르겠는 거예요. 검사하다 알게 됐죠. 당시에 혼자 살았고 돌봐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쉼터에 찾아 갔어요.”

온몸에 기력을 잃고 마음마저 지칠 대로 지친 그를 맞이해 준 건 백발의 외국인 수녀였다.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쉼터에는 수련자, 수도자를 비롯해 자원봉사자들이 여럿이었다. 어느날, 그는 궁금했다. 그들은 왜 세상이 외면하고 꺼리는 곳에서 이들을 돕고 있는지.

▲ HIV/AIDS 나누리플러스 활동가 윤 가브리엘 씨 ⓒ문양효숙 기자

“그분들이 그러는 거예요. 하느님이 가라고 인도했고, 자기들은 이런 게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하느님의 사랑이란 게 뭘까 궁금해 졌어요.”

몸과 마음이 힘들어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때였다. 삶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고 하루하루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성당에서 매일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라며 웃었다.

몸의 고통보다 더한 사회적 낙인
감염인들은 편견과 차별, 감시의 대상이었다

알려진 대로 HIV 감염인은 면역력이 떨어진다. 대체로 결핵, 폐렴 등의 병을 많이 앓고 CMV (CytoMegaloVirus, 거대세포바이러스)가 말초신경에 영향을 미쳐 팔다리가 저리고 시력과 청력을 잃기도 한다. 가브리엘 씨도 2006년 시력을 잃었다. 오른쪽 눈은 실명했고 왼쪽 눈만 뿌옇게 보인다. ‘기회질환’이라고 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면역력이 약한 ‘기회’가 생겼으니 바이러스가 그냥 넘어가질 않는 것이라고.

“처음에 감염 사실을 아셨을 때, ‘왜 나한테?’ 하고 억울한 마음이 생기진 않으셨어요?”
“게이들에게 에이즈는 낯선 무언가가 아니에요. 주변에서 아는 친구가 HIV에 감염됐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고. 그러니 공포스럽지만 ‘내가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한번씩은 해보고요. 그러니 병에 걸리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하게 되는 거죠. 무섭긴 했지만 억울한 마음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어요.”
“시력을 잃었을 때는 정말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것도 병원에서 예고를 받긴 했죠. 먹던 약에 내성이 생겨서 쓸 약이 없었거든요. CMV가 뇌에 미치면 뇌사가 올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병원에서 얘기 들은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나, 눈이 안 보였어요.”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예고 받았다 한들, 몸에 닥치는 고통이, 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쉼터로 돌아온 다음에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손발이 움직이나, 눈은 보이나 확인하면서 가슴을 졸이게 되더라”며 웃었다.

HIV 감염인들에게 몸의 고통보다 더한 것은 사회적 낙인이다. 감염인들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이 주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감염인에게는 ‘문란한 사람’, 혹은 ‘병원균 전파 매개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역병은 늘 사회에 가해지는 징벌로 간주된다’고 지적하며, 결핵, 암, 에이즈 등을 둘러싼 은유를 경계했던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2002, 이후)에서 지적한 대로,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었다.

“암에 걸리면, 주변에서 어쨌든 위로하고 걱정해주잖아요. 우리는 병에 걸리면 ‘어떻게 살았기에 그런 병에?’ 하는 사회적 냉대에 직면해야 해요. 직장 건강 검진 센터에서 사업자에게 검사 결과를 일괄 통보했던 때는 직장에 소문이 퍼져서 어제까지 나랑 같이 밥 먹던 동료가 갑자기 따로 밥 먹고 회식 가는 데 자기한테만 안 알려주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죠.”

병원에서 마취까지 한 뒤 감염 사실을 안 의사가 수술을 거부하거나 병원에서 환자가 사라졌다고 경찰이 수배를 내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감염 사실이 확인되면 질병관리본부에 실명으로 신고돼 3개월에 한번은 반드시 보건소에 가서 면담을 해야 했다. 면담을 하지 않으면 보건소 직원은 집으로, 직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감염인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편견은 방치되고 차별은 계속됐지만, 이들의 인권을 거론하는 이들은 없었다. 윤 가브리엘 씨를 비롯한 몇 명의 감염인들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으니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권단체와 의료단체가 뜻을 함께했다. 그가 활동하는 ‘HIV/AIDS 나누리플러스’는 그렇게 출발했고, 작년 10월,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그간 나누리플러스는 꾸준히 HIV 감염인과 AIDS 환자들의 인권을 이야기해 왔다. ‘감시’가 아닌 ‘인권’에 기반한 에이즈 예방법 개정을 요구하고, 특허권을 이유로 고가의 가격을 요구하는 제약사를 상대로 시위를 벌였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나마 익명 검진이 가능해졌고, 보건소에 정기적으로 신고할 일도 없어졌다. 직장 건강 검진의 결과도 본인만 통보받고 ‘에이즈를 이유로 고용 상, 근로조건 상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명시적 조항도 생겼다. 하지만 사회에 만연한 공포와 차별을 몰아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수술시에 HIV 감염 위험성이 발생했다면, 환자가 복용하는 HIV 약을 복용하면 예방할 수 있어요. 수술에서 감염될 확률은 만 분의 일도 안 되죠. 게다가 약을 먹는 환자는 바이러스가 현저히 낮아서 약을 먹지 않는 환자보다 감염률이 훨씬 낮아요. 0.2% 정도죠. 그런데도 수술을 거부하는 병원이 많아요. 얼마 전에는 국가인권위에서도 HIV 감염을 이유로 수술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기도 했지만 차별은 여전해요.”

▲ 윤 가브리엘 씨가 자신의 책 <하늘을 듣는다>를 쓰면서 느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삶을 투명하게 만드는 힘, 그것은 주변의 신뢰와 애정”

그는 감염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특유의 담백하고도 감성 어린 문체로 엮어 <하늘을 듣는다>(2010, 도서출판 사람생각)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배다른 형제들 속에서 외로웠던 어린 시절, 중학교 때 집을 나와 봉제공장에서 일한 시간, 자신의 성정체성을 발견하게 되기까지 등의 이야기를 자신이 사랑하는 노래와 버무려 따뜻하게 써 내려갔다.

“글 쓰는 시간이 ‘어린 날의 나’와 화해하는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전에는 내 삶이 누더기 같았어요. 나는 왜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나. 왜 어린 날 집을 뛰쳐나와야 했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나. 되돌아볼 때마다 부끄러웠고, 스스로를 자책했죠. 그런데 글을 쓰면서는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한 거예요. 어려웠을 텐데, 힘들었을 텐데 잘 견디고 잘 살아 왔구나 하고요. 어린 날의 나를 위로하게 됐어요. 전에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였는데 지금은 편안해요. 그러면서 주변의 상황이나 내 삶을 훨씬 긍정적으로 대면하게 됐어요. 피할 수 없다면 어쩌겠어요. 부딪히고 뚫고 나가고 그러는 거지.”

어렸을 때 세상과 사람에 목말랐고, 참 외로웠다는 윤 가브리엘 씨는 책의 마지막 장에 다 읽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이들을 언급하면서 고마움과 애정을 표현했다. 그에게 “지금은 덜 외로운가?” 물었다. 그는 “물론이다”라고 답하며, “인권활동하면서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인 듯도 하다”고 말했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공부도 못하고 봉제공장에서 일한 과거에 솔직하지 못했어요. 주변 활동가들은 전부 고학력에 엄청 대단한 사람들 같았죠. 그런데 난 중학교도 제대로 못나왔고 노동자로 살아왔고 이런 이야기를 밝힐 수밖에 없었어요.”
“왜요?”
“인권활동은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야 하잖아요. 내 말에 진정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으려면 무엇보다 내가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투명하게 드러냈을 때 외로움이 없어졌어요. 나를 감추면 사람들로부터 거리감이 있는 거니까 고립되고, 그게 어쩌면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기도 한 것 같아요.”

그는 솔직하게 드러냈을 때 자신을 받아준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다른 모임이었다면 저는 더 고립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인권활동가들은 편견도 없고 인권 감수성이 있어서 저를 긍정적으로 받아준 것 같아요. 아파서 혼자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다른 환자 병문안 왔다가 제 이름 보고 들어와서 먼저 알아준 것도 동인련(동성애자인권연대) 친구였어요. 힘든 때였는데, 친구들이 문병 오고 따뜻하게 위로해주곤 했죠.”

2009년 한국인권재단에서 주는 인권홀씨상을 받은 그는 당시 수상이 결정된 후 면담을 하러 갔을 때의 이야기를 전했다.

“추천서를 활동가들이 많이 써줬거든요. 제일 많이 써준 친구들이 동인련 친구들이었어요. 인권재단 쪽에서 그러는 거예요. 추천서를 어쩌면 그렇게 정성을 담아서 썼냐고. 추천서 읽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그는 “감염인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런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안아주면 감염인들도 그렇게 숨지 않아도 되거든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아픈 걸 드러냈을 때 주변에서 나를 외면했다면, 저도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거예요.”

삶을 투명하게 만드는 힘. 그것은 결국 주변의 신뢰와 애정이라고 가브리엘 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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