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2] 1월 26일 (연중 제3주일) 1코린 1,10-17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베드로)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1코린 1,12)

우리 교회의 자화상입니다. 굳이 비 가톨릭 그리스도인(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이 용어를 사용했다)과 가톨릭 그리스도인 사이의 분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드러내놓고 갈라서서, 다른 ‘조직’을 꾸려 드러내놓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조직과 교리 체계와 신앙의 단일성이 가장 큰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 천주교회의 교계제도 안에 있다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떠난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 사이는 ‘분열’의 관계라 볼 수는 없을까요? 둘째, 이 땅의 지역 사이의 격차, 노골적으로 말하면 지가(地價)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현상에서 교회는 자유로운가요? 교구와 교구 사이에 그 같은 격차가 존재한다면, 같은 교구 안에서도 그 같은 격차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분열’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셋째,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는 이 땅의 분열 현상이 있는데, 곧 이데올로기(소수의 배타적 · 폐쇄적 지배집단이 만들어 퍼뜨리고, 다수의 시민이 맹목적으로 휩쓸리는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습니다만)에 따른 분열이 그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진보’와 ‘보수’라고 점잖고 그럴듯하게 편 가름 했지만, 최근에는 그 정체와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는 ‘애국’과 ‘종북’으로 편을 가릅니다. 이 터무니없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같은 교회 안에서도 편 가름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분열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마지막으로 흔히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이야기했다가 잠잠해진 현상, 곧 종교와 정치의 관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종교(신앙)와 생활이 별개의 무엇이라 철석같이 믿는다면, 그것을 분열이라 볼 수는 없을까요?

▲ “최근에는 그 정체와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는 ‘애국’과 ‘종북’으로 편을 가릅니다. 이 터무니없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같은 교회 안에서도 편 가름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분열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사진은 지난 6일 시국미사가 열린 경기도 화성시 기산성당 앞에서 반대시위를 벌이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등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한상봉 기자

물론 ‘다양성’, ‘차이’, 혹은 ‘다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다양하고 다른데도 ‘대화’하고 ‘연대’하여 한 몸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면, 그것을 ‘다양성의 조화’라고, ‘일치’라고, 혹은 ‘공동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연대’는 그냥 동행하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 근심을 느끼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연대는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입니다. 그 근거를 교회는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93항). 여기서 ‘공동선’은 단순히 집단의 경제적 이익이나 집단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선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164항)입니다.

먼저 ‘연대’의 관점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교구와 교구, 같은 교구 안의 본당과 본당, 같은 본당의 교우와 교우, 그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이웃을 ‘또 다른 나’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나(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으로 보고 있는지.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 근심”을 갖고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지, 아니면 “공동선에 투신”하며 “모두에게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공동선의 관점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단순히 우리 집단의 이익이나 편안함, 곧 집단 이기주의 실현이 ‘공동체’ 생활의 목적이라고 보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을 갖추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지. 그런 “사회생활 조건”을 비교적 잘 갖춘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에 벽을 허물기 위해 연대하는지, 아니면 방관하거나, 체념하거나, 혹은 벽을 더 높이 쌓아 한 쪽에서는 안주하고, 다른 쪽에서는 신음하거나 좌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정신’ 혹은 ‘태도’의 관점에서 우리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씁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구에서는 사제들이 신자들 무서워서 말 못하고, ○○교구에서는 선배 신부들 무서워서 말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사제의 강론이든 훈화든 교리든, 듣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기준이 혹시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조작된 ‘이데올로기’라면, 우리의 정신과 태도는 신앙으로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이데올로기로 형성된 것인지. 더 나아가 ‘신앙’은 ‘마음’과 ‘생활’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코린토 교회의 분열은, 곧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 ‘베드로 편’, ‘그리스도 편’처럼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는지를 놓고 분열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가 다른 기준으로 분열되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의 교회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땅값을 기준으로 담을 쌓고,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담을 쌓고, 그리고 신앙과 생활 사이에 담을 쌓아, 이쪽 교회와 저쪽 교회로 갈라졌다면, 그래서 이쪽 교회에서는 수준 높고 점잖으며 품위 있는 신앙과 생활을 축복으로 여기고, 저쪽 교회에서는 ‘신앙’이든 ‘생활’이든 곤두박질쳐서 명맥을 유지하기도 벅차다면,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1코린 1,13)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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