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어느 날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자매님이 보이지 않아 늘 함께 하던 자매님에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 자매님의 대답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아녜스 자매님이요! 아들 군대 보내놓고 며칠 아파 누웠습니다.” 아들을 군대 보내는 어머니들의 또 다른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군에 보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도 어머니들의 하나의 문화인 모양입니다.

문득 내 젊은 날 군에 가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군대에 지니는 솔직한 심정은 3년 동안 가족과 친구와 헤어져 험한 고생길 떠나는 착잡함이었습니다. 군 입대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던 청년들이 그 풋풋하고 자유로웠던 청년기를 끝내고 타락한 기성세대의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가기 싫었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려는 과정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뿐, 국방의무, 애국심,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젊은이들을 달래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1.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후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2. 지난날들 돌아보면 숱한 우리 얘기
넓은 너의 가슴 열리고 마주 쥔 두 손엔 사나이 정이
내 나라 위해 떠나는 몸 뜨거운 피는 가슴에
(후렴)

-최백호의 ‘입영 전야’, 1978, 최백호 작사·작곡

 ⓒ박홍기

아마 지금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 군필 남자라면 입영 열흘 전부터 이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술을 마셔댄 경험을 모두 갖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술자리 끼어 정말 지겹도록 이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내 나라 위해 떠나는 몸’, ‘뜨거운 피’ ‘아쉬운 밤’, ‘뽀얀 담배연기’, ‘넘치는 술잔’을 젊음을 대신하는 가사들이 우리의 젊음을 끓게 하면서 후렴에 들어가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하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가사 가 전체 분위기를 압도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는 노래입니다.

군대 가기 전 날 집안에선 아들이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는 듯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라면 가야지” 하셨습니다. 짐짓 태연하시던 아버지도 돌아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천정을 쳐다보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일제시대에 징용으로 끌려갈 때도 그러했거니와 6·25 전쟁 중의 입영 전날 역시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모든 집안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습니다. 태평양전쟁 때 징용 간 친정 동생이 하얀 유골로 돌아온, 너무나도 아픈 기억을 가진 어머니일수록 아들의 군 입대는 마치 영원한 이별인 듯 극한으로 치닫는 슬픔과 애통함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이 같이 ‘슬픈 입영’은 80년대 군사 정권 시절에도 이어졌으니, 그리하여 가슴 먹먹함을 완화시키려는 노래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강제 징집 대학생이 지은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하는 원작 시에다가 당시의 명가수 최백호가 조금 고친 가사에다가 곡을 붙여 내놓은 ‘입영전야’라는 노래가 그것입니다. 이른바 입영 노래의 효시라 할 이 곡 이후 다시 유명해진 노래는 비운의 요절 가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입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민간인 생활 마지막 날 밤 선술집에 모여 앉은 친구들과 이 노래를 부르며 군대 생활의 두려움을 떨쳐내려던 우리네 청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군부대로 들어서는 장병에게 긴장은 느껴지나, 예전의 비장감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아니, 최근 102보충대에선 유명 가수들의 공연과 각종 이벤트로 ‘입영전야 행사’를 열어 입영 장병과 가족들을 위로해주므로 입영 전야의 어두운 옛 장면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나는 군 3년을 다녀왔습니다. 신학교로 돌아와 ‘신부 수업’에 젊음을 걸었습니다. 86, 87년 민주화의 바람이 젊은이들을 광풍으로 몰아넣었지만 신학교의 높은 담벼락이 그 바람을 막아 주었습니다. 그래도 신학교의 문틈으로 불어오는 미풍은 막지 못했습니다. 그 때 담벼락 밖 역사의 현장에 젊은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자책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사회과학서적을 뒤적거리며 외출 날이 되면 세상냄새를 맡기 위해 시위 군중 속에 끼어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신부가 되었고, 신랑이 아닌 신부로서 ‘사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다시 돌아보니 젊은이 정신을 놓은 적이 없습니다. 삶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그러나 하루하루는 더디고 더뎠으며, 아스라이, 차창을 스치는 풍경처럼 지나가는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아직도 젊음을 살고 있습니다.

또 10년이 지나 쉰이 넘은 나이에, 나는 또 한번 지나간 청춘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 내게도 청춘이 있었지. 청춘이...... 있었던가? 그러니까 그 옛날, 마치 백악기나 중생대 같은, 그러니까 이억, 이천오백만 년 전.

문득, 그러나 실은 한 번도 청춘이 아닌 적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쉰 살이 넘어선 지금 나는 깨닫습니다. 묘한 기분입니다. 이럴 수가! 실은 내게 단 한 번도 청춘이 아닌 적이 없다니, 어떤 화석도 나오지 않은 중생대 지층처럼, 돌이켜 보니 내가 믿어 온 청춘 그 청춘은 늘상 내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몰랐던 얘기지만 나도 당신도, 아니 대부분은 청춘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청춘은 보다 근사하고 멋진 삶의 특수한 지층입니다. 단지 젊다는 이유로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청춘입니다. 이미 내게 청춘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청춘을 다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저 연두의 새싹처럼 용감하고, 무모하고, 에너지 충만한 어떤 것입니다. 어둠과 불의의 세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일어서는 힘입니다. 그 힘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다워 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푸르고 아름다운 인생의 특수한 지층인 청춘을 살 것입니다.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현애원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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