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로메로’를 기대하는 것은 꿈일까?

로메로(Romero, Oscar Arnulfo, 1917~1980) 대주교가 있었다. 그는 본래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1977년에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까지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적 사목방침을 우려하는 전통주의자였고, 현실 참여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찬 그리스도론’이라고 비난했던 사제였다. 그래서 그의 대주교 서임을 엘살바도르 민중은 절망으로 받아들였고, 군부와 기득권층과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보수적인 주교들만 박수치며 좋아했다.

그런 로메로가 대주교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유한 지주들을 공공연히 비난하다 암살당한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추모 미사를 집전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입게 된다. 그 당시 엘살바도르는 정치적 억압, 특히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해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군부에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뒤 로메로 대주교는 ‘투사’로 변신한다. 그의 입에서 “여러분이 세상의 예언자들이다.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의 불의에 대항하라.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부하라!”는 외침이 나올 줄 누가 상상했을까.

그는 그렇게 가난한 민중들 곁에서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협박하며 살해 위협을 할 때면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안에서 부활할 것이다”라는 예언적 고백까지 한다. 결국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의 프로비덴시아 병원 천주의 섭리 소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가운데 군부의 사주를 받은 4명의 괴한에 의해 암살당한다. 예언대로 로메로는 죽었지만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 2012년 5월 10일, 서울 명동 주교관 정문에서 열린 ‘제14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임명 발표식’에 참석한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왼쪽)과 염수정 대주교. 결국 이번 추기경 임명으로 연이어 한국 교회는 보수 성향의 추기경을 갖게 되었다. ⓒ강한 기자

새로운 추기경에 서임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께 이런 변화를 바라는 것은 꿈일까. 한국 교회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개혁적인’ 추기경이 한국 교회에서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음에도 보수적인 주교가 ‘다시’ 추기경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될 추기경을 교황청에 청원하기 위하여 교회 사상 처음으로 평신도단체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추진위원회’에서 수천 명의 온라인 서명까지 받았던 한국 가톨릭교회 개혁세력에게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소식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독선과 불통의 지도자로 인해 ‘민주주의’, ‘정의’, ‘평화’가 위협받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이미 교회 안에도 뿌리 깊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정화시켜줄 추기경에 대한 신자들의 바람은 어느 때보다 높았고,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말한 “야심이 있는 이들, 주교직을 노리는 이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갈망이 그야말로 ‘꿈’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아직도 채워야 할 고난과 시련의 양이 부족하다는 시대의 징표인가. 한국 가톨릭교회가 다시 박근혜 정권과 보수적인 추기경, 그 이중적 질고에 던져진 듯 느껴지는 아픈 현실이다.

교황청 입장에서야 서울대교구장이라는 현실적 대표성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수정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과 관련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가 “교황께서 추기경을 임명한 것은 한국 교회가 아시아 교회와 세계교회에 더 크게 기여해줄 것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처럼, 이번 결정은 한국 국내 사정을 고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우선은 교황청에겐 큰 비전인 ‘선교의 땅’ 아시아 대륙 전체를 향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큰 역할을 헤아리며 관리자형 추기경을 선택한 듯 여겨진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함께 한국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식 역시 그런 차원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아쉬움을 숨길 수 있으랴. 염수정 대주교와 관련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2012년 8월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구속자들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8 · 15 특별사면 결정을 기다리며 염수정 대주교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전임 정진석 교구장이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후임 교구장이 만나는 것은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최근에는 전주교구의 원로사제 박창신 신부의 “이번 대선은 부정선거,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구속 수사하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하라”는 발언에 대하여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대단히 정치적인 발언으로 교회 전체에 혼란을 초래했다. 이 두 사건은 내게 그의 가치관을 짚어보게 하였고, 그가 추기경 후보 제1순위라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염수정 대주교는 추기경 서임 소식을 듣고서 “몹시 마음이 무겁고 두렵고 떨린다. 부족한 사람이니 많은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참된 목자(요한 10,11)의 자리가 어찌 무겁고 두렵고 떨리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교회의 길은 어디인가! 바로 백성의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로 들리는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 목자가 함께할 때 무겁고 두렵고 떨리는 자리는 기쁨의 자리(요한 10,3)가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고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그 길은 로메로가 갔던 길이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복음적 가치관을 따랐던 많은 이들이 갔던 길이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셨던 길이다.

부디 이번에 선임된 염수정 대주교가 추기경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대로’ 한국 교회를 쇄신과 복음적 투신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길에서 새 추기경이 하느님의 도우심 안에서 늘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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