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2014년 평화의 날 메시지

 

 ⓒ한상봉 기자

평화의 기초이며 평화로 향한 길인 형제애(fraternity)

1. 이것이 저에게는 첫 번째 세계평화의 날 메시지입니다. 저는 개인이건 민족이건 모든 사람의 삶이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차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이 메시지를 통해 전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한 생활(충만한 생명)을 열망합니다. 그 열망에는 형제애에 대한 갈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제애는 다른 이들과 동행하는 삶을 이끌어내고, 다른 이들을 적이나 반대자로 보지 않고 형제와 누이로 받아들이며 포용할 수 있게 합니다.

형제애는 인간성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이야말로 서로를 존중하며 친형과 친동생으로 혹은 친누이로 대하도록 합니다. 형제애가 없다면 공정한 사회와 탄탄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형제애를 가정에서 먼저 배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족 구성원은 서로,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상호 책임을 지며 상호 보충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모든 형제애의 원천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은 평화의 기초이며 첫 번째 길입니다. 가정은 그 주변의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을 성소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정보수단과 상호유대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민족 사이의 공동운명과 인류 일치에 대한 자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역사의 역동성에서, 그리고 인종과 사회와 문화의 다양성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여서 돌보아야 할 형제와 자매로 구성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명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이 세상에서 빈번하게 부정되거나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 “무관심의 세계화”는 서서히 우리를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게 하며, 대신 스스로를 자기 안에 가두는 인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 특히 생명권과 종교자유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끝임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파렴치한 학대와 다른 이들을 절망으로 내모는 인신매매 같은 비극적 현상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무력 충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잔혹한 전쟁이지만, 그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잔혹한 전쟁은 무수한 생명과 가정과 기업들을 궤멸시키는 수단을 갖고 있는 경제와 금융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가 지적한 것처럼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이웃으로 만들고 있지만, 우리를 형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1) 수많은 불평등, 빈곤, 불의의 상황들은 형제애가 심각하게 결여되었다는 표징이면서 동시에 연대의 문화가 없다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만연하는 개인주의, 자기중심주의, 물질주의적 소비주의 같은 새로운 이념들은 사회적 유대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이념들은 가장 약한 이들과 ‘쓸모없는 이들’로 간주되는 이들을 포기하게 하고 경멸하게 하는 소위 “내다버리는” 사고들을 부추깁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 사회는 점점 이기적이며 동시에 실용적인 태도, 곧 오로지 do ut des (I give that you may give, 당신이 수 있는 만큼만 나도 주겠다)의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한편 세속의 윤리 시스템으로는 형제애라는 참된 유대를 구축할 수 없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궁극적 기반으로서 모두의 아버지가 없는 그런 형제애란 결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2) 사람들 사이의 참된 형제관계가 형성되려면 초월적인 부성(Fatherhood)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부성을 인정할 때에만 인간의 형제애가 강화됩니다. 그럴 때에만 각자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이웃”이 됩니다.

“네 동생은 어디 있느냐?”(창세기 4,9)

2. 형제애에 대한 인간의 소명을 보다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들을 찾아내고 그 장애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획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하느님의 계획은 성경에 훌륭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창세기 1,26 참조)라는 공동의 조상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에게서 카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이 첫 가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의 기원을 보며 개인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아벨은 양치기입니다. 카인은 농부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하는 활동과 문화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그들이 하느님과 또 피조물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원과 소명은 본질적으로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형제가 되어야 할 카인의 소명을 분명하게 배척한 것에 대한 비극적 증언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창세기 4,1-16 참조)는 모든 사람이 다른 이를 돌보며 살도록 불림을 받았다는 어려운 임무를 보여줍니다. 아벨은 자기의 양 무리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께서 아벨을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기 4,4-5). 카인은 질투 때문에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카인은 아벨을 형제로 존중해야 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아벨과 올바른 관계 맺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갖고 하느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소명을 거부한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묻습니다. 카인은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 4,9). 그런데 창세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나왔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카인으로 하여금 형제애의 유대를 존중하지 않도록 한 것이 무엇일까?’ 그러면서 동시에 ‘카인을 동생 아벨과 결합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악과 공모했음을 꾸짖으십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있다.”(창세기 4,7). 그러나 카인은 악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기로” 결정했습니다.(창세기 4,8)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경멸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카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애를 나누며 살라는 원초적 소명을 거스른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가 원래 형제애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동시에 이 부르심을 거스를 수 있는 비극적 능력도 갖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이기적 행위들 속에서 매일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전쟁과 불의의 뿌리에는 이 이기심에 따른 행동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형제와 자매들의 손에 살해당합니다. 형제와 자매를 살해하는 이들에게서는 자신이 자기 증여와 친교를 위해, 곧 상호관계를 위해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오 23,8)

3.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묻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과연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심어놓으신 형제애에 대한 열망을 온전하게 따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순전히 자기들만의 능력으로 무관심과 자기애와 증오를 극복하고, 사람들 사이의 정당한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너희 모두는 형제이며 자매다”(마태오 23,8-9 참조) 형제애의 근거는 하느님의 부성입니다. 불분명하고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부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 놀랍도록 구체적인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오 6,25-30 참조) 형제애를 실현하는 것은 이 부성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를 변형시키는데, 그리고 우리의 삶을 연대와 순수한 나눔에로 인도하는 데 가장 뛰어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형제애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그리스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써 형제애는 재생됩니다. 형제애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십자가야말로 형제애를 만들어 낸 결정적 장소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회복)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심으로써(필리비 2,8 참조), 당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새 인류는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의 뜻과 온전하게 친교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과 계획안에는 형제애에 대한 우리의 소명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계획을 처음부터 따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결정적이며 새로운 원리가 되셨습니다. 곧 우리 모두 같은 한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서로를 형제이며 자매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체로 계약입니다. 즉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고 형제와 자매로서 다른 이들과 화해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역시 사람들 사이의 분리, 계약의 백성과 이방인 사이의 분리를 끝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죽음 순간 때까지 희망을 갖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약속의 보따리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페소서가 전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안에서 화해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장벽을 허물어뜨리심으로써, 즉 사람들 사이의 적개심을 없애심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 안에 한 민족, 새로운 인간,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에페소 2,14-16 참조)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여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보고, 무엇보다도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바칩니다.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이의 아버지를 알아보며, 그 결과 모든 이에게 개방된 형제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 혹은 딸로 환영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 분 안에서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며, 결코 경쟁자가 될 수 없고 더더욱 적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가족 안에서, 곧 모두가 같은 아버지의 아들과 딸인 그곳에서, 그리고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와 결합되었기 때문에, 곧 아들 안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되었기 때문에, “사용 후 버릴 수 있는 생명들”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엄을 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 형제자매들의 운명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관심한 채로 남아있을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됩니다.

평화의 기초이며 평화로 향한 길인 형제애

4. 형제애가 평화의 기초이며 평화로 향한 길이라는 것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선임 교황들이 쓴 사회회칙들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평화에 관한 정의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앞의 회칙에서 우리는 민족들의 참된 발전이 평화의 새로운 이름(3)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뒤의 회칙에서 우리는 평화가 연대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배우게 됩니다.(4)

바오로 6세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민족들도 형제애의 정신으로 서로 만나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호 이해와 우정으로, 이런 거룩한 친교로 ... 우리는 인류의 공동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활동해야만 한다.”(5) 우선, 이 의무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 임무는 인간적이며 초자연적 형제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세 가지 의무로 드러납니다. 우선 연대의 의무로서, 이는 부유한 나라들이 덜 발전된 나라를 지원할 것을 요구합니다. 다음으로는 사회정의의 의무로서, 이는 좀 더 큰 공정성의 관점에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를 재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보편적 사랑의 의무로서, 이는 모든 이를 위한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을 지향합니다. 보다 인간적인 세상에서는 다른 이들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만들어내는 진보가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건넬 것과 받을 것이 있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는 보편적 사랑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6)

그리고 우리가 평화를 연대의 열매로 본다면, 형제애가 그 주요 토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를 분해할 수 없는 선(indivisible good)이라고 밝혔습니다. 평화는 모든 이에게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선한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가장 높은 수준의 생활로서, 또 보다 인간적이며 지속가능한 발전으로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한 결의”(7)인 연대의 정신으로 살 때에만 진정으로 성취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평화가 “사적 이익에 대한 욕망”이나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구되는 것은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는” 각오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들을 섬기는” 각오 입니다. ‘다른 사람’을 - 한 사람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 일종의 도구로, 저가로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과 체력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더 이상 효용이 없을 때에는 내버릴 것으로 보지 말고, 우리 ‘이웃’으로, ‘우리를 돕는 이’로 보아야 합니다.(8)

그리스도교의 연대는 이웃을 단지 “각자 나름대로 권리와 다른 이와 근본적인 평등성을 갖춘 인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되었으며, 성령의 항구한 활동으로 인도되는 존재, 곧 아버지 하느님의 생생한 모상으로서”(9)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밝힌 것처럼 “이 점에서 하느님께서 만인의 아버지이시고 만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며 - 아들 안에서 자녀가 됨 - 성령의 현존과 생명을 주시는 활동을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관을 해석하는 새로운 기준”(10)이 되며, 또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기준이 될 것입니다.

빈곤과의 투쟁에 전제조건이 되는 형제애

5.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전임 교황은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형제애가 부족한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이 바로 빈곤의 주요 원인이 되는지를 환기시켰습니다.(11) 많은 지역에서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의 건강한 관계가 사라지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의 심각한 빈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 주변화, 소외, 그리고 점점 증가하고 있는 다양한 형식의 병리적 의존성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공동체에서 형제적 관계를 존중하고 재발견해야만 합니다.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인 기쁨과 슬픔, 어려움과 성취를 공유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절대빈곤이 줄어들고 있지만, 상대빈곤이 심각하게 증대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 지역 안에서, 혹은 특정 역사 문화적 배경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룹들 사이의 불평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형제애의 원리를 증진시키는 효과적인 정책들이 있어야 합니다. 즉 그 존엄성과 인권에 있어서 평등한 모든 사람이 자본, 서비스, 교육 자원, 의료, 그리고 기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 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계획을 세우고 실현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소득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른바 ‘사회적 담보’(social mortgage)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적 담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이 재화의 소유권을 갖는다”(12)는 것이 비록 적법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디에 쓰느냐에 관한 것에 제한을 받는다. 즉 “그들은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공동으로 속한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그 재화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13)

마지막으로 형제애를 증진하는 다른 형태가 - 그럼으로써 빈곤을 물리치는 - 남아 있는데 이는 다른 모든 형태의 형제애 증진에 바탕이 된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소박하면서도 필수적인 것으로만 생활하겠다며 그 삶을 사람들, 자신의 부를 나눔으로써 다른 이들과 형제적 친교를 체험하려는 사람들의 초연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초연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기본입니다. 이는 청빈 서약을 한 수도자들만의 경우가 아니라 다른 이웃과 형제적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선한 것임을 굳게 믿는 책임 있는 시민과 많은 가정에도 해당됩니다.

경제 분야에서 재발견해야 할 형제애

이 시대 심각한 금융 및 경제 위기의 기원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멀어지는 데에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물질 재화에 대한 탐욕적 추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관계와 인간상호 관계의 황폐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심각한 지속적 금융 및 경제 위기는 건전한 경제 원리와는 거리가 먼 소득과 소비에서 만족과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을 내몰고 있습니다.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뤘지만, 사람은 그 지배의 실마리를 잃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자신의 인간다움은 세상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물론 이 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공동체 생활의 조직 전체를 통해서, 생산 시스템을 통해서, 사회 대중매체 수단이 가하는 압력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직면한 위험”(14)으로서 주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연이은 경제위기는 현재의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재고와 생활양식의 변화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인간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별, 절제, 정의, 용기 같은 덕목들을 재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덕목들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우리를 서로 결합시키는 형제적 유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형제적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수반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덕목들은 인간 존엄함에 부응하는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합니다.

전쟁의 불을 끄는 형제애

7.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가 전쟁이라는 파괴적 경험을 참아야 했습니다. 이 전쟁은 형제애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물력)충돌이 우리의 태연한 무관심 속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테러와 파괴가 자행되는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저와 교회 전체가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이들, 곧 전쟁에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희생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피난한 사람들, 내 쫓긴 사람들, 공포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지도자들이 희생자들의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라고, 또 모든 형태의 적개심, 학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침해를 끝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15)

그 때문에 저는 무력을 동원해서 폭력과 죽음을 유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 그 사람을 간단히 쓰러뜨려 버려야 할 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에게서 당신의 형이나 누이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들었던 손을 내려놓으십시오.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대화와 관용과 화해 속에서 다른 이를 만나십시오. 당신을 중심으로 정의와 신뢰와 희망을 구축하십시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세계 시민에게 무력 충돌들은 항상 국제적 조화의 교묘한 부정이며 뿌리 깊은 분열과 깊은 상처를 만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전쟁은 국제공동체가 세워놓은 위대한 경제 사회적 목표 추구를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엄청난 양의 무력이 지금까지도 유통되고 있다는 것은 적개심에 불을 댕길 새로운 구실을 찾고 있다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저는 저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력사용을 금지할 것과 핵무기와 화학무기의 폐기로 시작해서 모든 당사자들이 무장을 해제할 것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제 협약과 국가법이 분명히 필요하고 또 바람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류를 무력 충돌로부터 보호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은 것이 필요합니다. 한 마음은 충만한 생명(의 문화)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서로 보살피고 함께 협력해야 할 형이나 누이로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 조직을 포함해서 시민사회로 하여금 평화를 증진하는 여러 활동을 이끌어 가는 정신입니다. 저는 모든 이의 매일의 (평화에의) 헌신이 끊임없이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권이 인권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 그리고 다른 모든 권리들의 필수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밝힙니다.

형제애를 위협하는 부패와 조직적 범죄

형제애는 모든 사람의 삶의 완성과도 관련을 맺습니다. 사람들이 갖는 정당한 열망, 특히 젊은이들이 갖는 열망, 그 열망을 꺾거나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 열망을 실현시키려는 희망을 빼앗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 열망이 권력의 남용과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상호 존중하는 자세로 서로 경쟁해야 합니다.(로마 12,10 참조) 삶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을 제거해야 할 적이나 반대자라고 여기지 않도록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또 우리 자신 배워야 합니다.

형제애는 자유와 정의 사이, 개인적 책임과 연대 사이, 개인의 선익과 공동선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사회적 평화(social peace)를 가져옵니다. 또한 정치 공동체는 이 모든 것(형제애와 사회적 평화 실현)을 위해 투명하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공권력이 시민들의 자유를 위해 대신해서 활동하고 있다고 시민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분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시민들과 기구들(정치공동체, 정부) 사이에 빈번하게 틈이 벌어집니다. 이런 분파적 이해관계는 지속적인 갈등을 만들어냄으로써 시민들과 정치공동체 기구들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킵니다.

개인적 이기심은 사람들이 조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충돌합니다. 형제애라는 참된 정신으로 이 개인적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같은 이기심은 사회적으로 증식됩니다. 즉 오늘날 광범위하게 퍼진 수많은 형태의 부패 속에서, 혹은 작은 규모부터 세계적 차원까지 조직된 범죄 조직의 속에서 이 이기심은 자랍니다. 이런 부패 및 범죄 그룹들은 인간의 존엄함 그 자체를 직접 훼손함으로써 법과 정의를 무너뜨립니다. 이런 부패 및 범죄 조직들은 하느님을 드러내놓고 공격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며 세상 모든 피조물에 해를 끼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종교적인 함의를 가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마약 남용에 관련한 마음 아픈 이야기들을 생각합니다. 마약 남용은 도덕법과 시민법을 무시하고 이익만을 취합니다. 저는 자연의 파괴와 지속적인 오염과 노동 착취라는 비극을 생각합니다. 저는 불법적인 자금거래와 금융투기도 생각하는데, 이는 수많은 사람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경제와 사회 조직 전체에 약탈적이고 해롭다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매춘을 생각합니다. 매춘은 매일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며 그들에게서 미래를 강탈합니다. 저는 인신매매와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범죄 같은 극악무도함을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도 지구 곳곳에 남아 있는 노예노동의 공포를 생각합니다. 이민자들의 비극은 간과되기 일쑤입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파렴치하고 불법적인 행위로 희생됩니다. 요한 23세는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폭력의 관계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인간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성장과 완성을 촉진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한다.”(17) 그러나 인간은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절망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모든 이에게, 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희망과 자신감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며 그가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에제키엘 18,23 참조)

인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넓은 맥락에서 범죄와 형벌을 볼 때, 아직 많은 감옥이 여전히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에 갇혀 있는 이들은 빈번하게 그들의 존엄함을 훼손당하면서 인간 이하의 상태로 떨어지며, 재활의 희망과 열망은 사라집니다. 교회는 이런 곳에서 대부분 조용하게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가 더 많은 일을 하기를 권고하며 지지를 보냅니다. 이런 영역에서 용감한 많은 이들이 기울이고 있는 노력들에 대해서 공권력이 공정하고 성실하게 지원해주기를 희망합니다.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는데 도움이 되는 형제애

9. 인류 가족은 창조주로부터 공동의 선물, 곧 자연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은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단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 개입이 유익하고 책임감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자연에 새겨진 ‘법칙’을 존중하고, 모든 이의 이로움을 위해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유용함과 합목적성과 생태시스템에서의 위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연은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에 대해 책임 있는 관리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는 탐욕, 정복, 소유, 조작, 그리고 착취의 오만함을 부립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존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을 반드시 잘 돌보아야 할 것으로, 미래 세대를 포함한 우리 이웃 형제자매를 위한 축복의 공동의 선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인류에게 식량을 마련해 주는 농업 분야는 자연 자원을 가꾸고 보호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요 생산 분야입니다. 이 점에서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는 굶주림은 불명예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구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현대 사회는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그 우선순위의 체계에 대해 반성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굶주림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지구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 가능한 해결책과 대책은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생산을 늘리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생산량이 충분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백만 수천만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죽어갑니다. 이야말로 수치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가 땅이 주는 열매에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과 빵부스러기로라도 만족해야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간극을 메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정의와 평등,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모든 사람에게 가톨릭 사회교리의 근본 원리들 가운데 하나인 ‘모든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를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이 원리를 존중하고 실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필수품에 효과적이며 공정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조건이며, 또 모든 이의 생필품의 권리를 촉진하는 데 핵심 조건이 됩니다.

결론

10. 형제애를 발견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며, 체험해야 하며, 선포해야 하며, 그리고 증언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사랑만이 형제애를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체험하게 해 줍니다.

정치와 경제 분야의 현실 행위가 단순히 이상을 도외시하고, 인간의 초월적 차원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단순한 기술적 방법쯤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이 개방성이 결여되었을 때 모든 인간 활동은 황폐해지고 인간은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정치와 경제도 모든 사람을 각각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넓은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적 사랑(fraternal charity)의 참된 정신에 기초한 (현세 사물) 질서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치와 경제는 통합적인 인간 발전과 평화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믿습니다. 모두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그리스도의 선물에 따라서, 즉 공동선을 위해서 필요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소 4,7-25; 1코린토 12,7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신적 은총, 즉 그분의 생명을 함께 나눌 가능성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한 분, 그분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께로 부르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인류는 하느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상호호혜성(reciprocity), 용서, 완전한 자기증여로 촘촘하게 엮인 형제적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내딛을 것을 요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공감하고, 고통 받는 이와 다른 이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고통과 희망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오솔길을 걷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형제자매들의 선익을 위해 자유롭게 하느님의 그 사랑을 건네주는 법과 그 사랑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모두를 껴안으며 아무도 잃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과 심장의 문을 열라고 강요하거나 억압하면서 구원의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22,26-27) 그러므로 모든 활동은 사람을, 특히 가장 멀리 있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가장 약한 사람을 섬기는 태도로 해야 합니다. 섬김은 평화를 구축하는 형제애의 혼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여, 당신 아들의 마음에서 샘솟는 형제애를 저희가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럼으로써 사랑스러운 우리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저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각주

1. 회칙 ‘진리 안의 사랑’, 19항.
2. 회칙 ‘신앙의 빛’, 54항.
3. 회칙 ‘민족들의 발전’, 87항.
4. 회칙 ‘사회적 관심’, 39항.
5. 회칙, ‘민족들의 발전’, 43항.
6. 회칙, ‘민족들의 발전’,44항 참조.
7. 회칙, ‘사회적 관심’, 38항.
8. 회칙, ‘사회적 관심’, 38-39항.
9. 회칙, ‘사회적 관심’, 40항.
10. 회칙, ‘사회적 관심’, 40항.
11. 회칙 ‘진리 안의 사랑’ 19항 참조.
12. 신학대전 II-II q. 69, art. 2.
13. 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69항; 회칙 ‘새로운 사태’, 19항; 회칙 ‘사회적 관심’, 42항; ‘간추린 사회교리’, 178항.
14. 회칙 ‘인류의 구원자’, 16항.
15. ‘간추린 사회교리’,159항
16. 푸틴 대통령에게 보낸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한(2013년 9월 4일)
17. 회칙 ‘지상의 평화’ 34항


박동호 신부 번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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