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33

“2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습니다. 26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시오.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입니다.”(마태오 23,25-26)

오늘 본문은 공통년(서기) 50-70년에 예수 추종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야기를 마태오가 수록한 것이다. 예수가 직접 한 말씀은 아니다. 그릇의 겉과 속의 깨끗함에 대한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 사이의 바리사이파 내부 논쟁이 본문의 배경이다. 그릇의 겉과 속을 구분하는 관행은 바리사이파에서도 1세기 중반에 생겼다. 힐렐 학파가 바리사이 개혁파라면 샴마이 학파는 바리사이 보수파다. 예수를 힐렐 학파로 분류하는 유다교 학자들이 있다.

그릇의 겉이 더러우면 그릇 속의 내용물도 버려야 한다.(레위기 11,33-35; 민수기 19,15) 그러나 그릇의 겉이 더럽더라도 그릇 속의 내용물을 버리지 않도록 랍비들은 차차 그릇의 겉과 속을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힐렐 학파는 잔의 속이 깨끗하면 잔의 겉도 깨끗하다는 입장이다. 잔의 속이 잔의 겉을 결정하지 않으며 겉도 또한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샴마이 학파의 입장이다. 샴마이 학파가 그릇의 속보다 겉을 더 중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릇의 겉과 속 전체를 신경 썼다. 70년 이후 힐렐 학파의 입장이 유다교에 자리잡았다.

25절 파로피스(parophis)는 반찬 또는 반찬을 담는 그릇을 가리킨다. 하르파게(harpage)는 강도 행위 또는 빼앗은 물건을 가리키며 빼앗으려는 욕심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다. 아크라디아스(akradias)는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는 상태, 특히 지나친 성욕과 식탐을 가리킨다. 내가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굶게 된다. 부자와 강대국의 탐욕은 가난한 사람들과 제3세계에 희생을 강요한다. 인간의 탐욕은 환경과 자연을 멍들게 한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8-9)

26절에서 마태오는 힐렐 학파를 편드는가. 마태오는 바리사이 학파들 내부의 의견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함께 비판한다. 마태오는 그릇의 겉과 속의 구분이라는 전례 내부의 논쟁을 뛰어 넘어 전례와 윤리의 관계로 옮아간다. 전례에 대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비슷하다. 1. 전례는 윤리적 요소를 포함한다. 2. 전례적 흠보다 윤리적 흠이 개인과 종교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친다.(이사야 1,15-17; 예레미아 33,8; 시편 51,4.9) 전례적 깨끗함을 높이 평가하지만 윤리적 깨끗함을 소홀히 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은 유다교나 그리스도교에서 공통이다.

진정한 깨끗함은 겉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예레미아 4,14; 시편 24,4) 독자들에게 산상수훈의 한 구절이 떠오르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오 5,8) 예수 당시 유다교는 전례적 깨끗함에 크게 집중하였다. 유다교 문헌 미쉬나(Mischna)에서 가장 많은 비중은 전례적 깨끗함에 대한 것이다. 사제, 에세느파, 바리사이파 모두 마찬가지다.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피식민지 백성 이스라엘의 지배세력이 전례에 집중하다니, 오늘 우리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례적 깨끗함에서 거리를 두려는 흐름도 점차 생겨났다. 필로(Philo)를 선두로 한 해외 유다교, 바리사이파가 아닌 랍비 요한 벤 자카이, 예수와 제자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 그룹, 에픽테투스가 이런 흐름에 속한다.

그릇이 없으면 그릇이 만드는 공간도 없다. 그릇이 수단이라면 그릇이 만드는 공간은 그릇의 목적이다. 그릇의 속이 겉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릇을 마음으로 비유하는 말씀이다. 본문의 뜻을 요약하자. 1. 예수는 전례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폐지하지는 않았다. 2. 전례와 윤리는 일치한다. 3. 전례보다 윤리가 더 우선이고 중요하다. 그리스도교에서 윤리보다 전례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전례중심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아직도 있다. 전례중심주의는 성직자중심주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은 전례를 강조하여 종교권력을 유지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자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성직자 중심주의는 사실 성직자들이 오래도록 신자들에게 강요해온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판하고 광야에서 요한에게 가르침 받은 예수를 그리스도교는 잊었는가. 예수가 비판한 전례중심주의가 되레 그리스도교에서 더욱 완강해지고 있다. 칼 라너(Karl Rahner)는 가톨릭의 전례중심주의를 한탄하면서 이런 추억을 말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사제 서품 3주 전에야 미사 드리는 연습을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당연히 신학공부에 열중하였다. 요즘 겉멋이 든 종교인들이 적지 않다.

교회와 성당에서 바치는 전례는 물론 거룩하고 아름답고 중요하다. 그러나 정성스레 미사를 집전하지만 윤리적으로 흠이 있는 사제는 반성해야 한다. 전례에 충실하지만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종교인은 회개해야 한다. 미사를 바치면 그날 일과는 거의 끝난 셈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제들에게 오늘 본문은 따끔한 경고다. 전례에 마땅히 쏟는 그 정성으로 불의에 저항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일치하고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거리 미사는 성당의 미사보다 오늘 본문의 정신에 훨씬 더 가깝다.

전례를 통한 깨끗함이 아니라 의롭게 얻은 재산이 사람을 깨끗하게 한다. 매일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불의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불의에 가담한 종교인이 바치는 전례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다. 불의한 세력에 가담하면서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도 마찬가지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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