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8]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인사말에 그토록 많은 사연과 안타까움과 기대가 담겨 있었는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한 대학생이 자신의 학교 후문에 손으로 써서 붙인 대자보에 손으로 쓴 답글 쪽지들이 붙고, 역시 손으로 쓴 답글 대자보로 이어져 다른 대학으로, 거리로, 고등학교로, 세대를 넘나들며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손 글씨 대자보는 문자와 사진으로 재생산되어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저와 같이 멀리 해외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날아옵니다. 대자보를 읽은 사람들은 또 대학가로, 광장으로, 공원으로 모여들어 얼굴을 마주 보며 목소리를 모읍니다.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을 결합하여, 우리는 오늘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안녕들하십니까?”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행렬은 물론 그 배경과 목적은 다르지만, 빠르게 저변으로 확산되며 범국민적 동의를 얻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2년 전 미국에서 시작된 ‘오큐파이(Occupy Wall Street)’ 운동을 연상시킵니다. 2011년 가을과 겨울, 미국을 뜨겁게 달구며 전세계로 퍼져나간 오큐파이 운동은, 캐나다의 반(反) 소비지상주의 매체인 <애드버스터(Adbuster)>가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인 뉴욕시 맨하탄 남부 월가에 모여 텐트를 치고 평화 점거를 벌이자는 내용을 자신들의 잡지에 싣고 그해 9월 17일 행동에 옮김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50명 정도의 인원으로 시작된 월가 점령은 10월초에 이르자 수만 명 규모의 대형시위로 발전하며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애틀랜타, 시카고 등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들을 넘어 로마, 도쿄, 서울 등 세계 각지의 도시들로 확산되었습니다. 운동의 주적은 미국의 정치경제를 장악한 1%의 금융자본이었습니다. “우리 99%는 너희 1%의 탐욕과 부패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즉 금융자본이 훼손하고 있는 민주주의 질서, 금권과 결합하고 있는 정치에 대한 반발이었죠.

공공부문의 민영화, 부정선거 의혹, 사회 · 정치 · 경제 민주화의 후퇴 등 절박한 사회문제들이 압박해 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촉발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행렬은, 상징적 저항과 캠페인의 특성이 더 강했던 오큐파이 운동과 명백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닮은꼴로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 움직임의 주도적 힘은 조직화되지 않은 젊은이들입니다. 대자보 행렬과 마찬가지로 오큐파이 운동도 체계적인 구호와 목적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산발적이고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확산되었죠. 인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데이비드 그래버(David Graeber)는 2011년 9월 25일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오늘의 신세대는 고등교육을 마친 후 직장과 안정된 미래가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빚을 떠안는다. 이들은 기성세대가 말한 그대로 공부하고, 대학에 갔지만 지금 그 결과로 벌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패배자나 무뢰한으로 간주되어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지요? 어느 세대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왔고,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면서도 취업의 문턱에 좌절해야 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현실이 겹쳐집니다.

미국에 살며 오큐파이 운동의 발발과 진행을 지켜보면서 제가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창의적이고도 “발칙한” 운동 방식이었습니다. 금융자본의 혈관인 대규모 은행으로부터 돈을 일제히 인출하여 소규모 마을 단위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는 집단행동을 하기도 하고, 2012년 메이데이를 총파업의 날로 정해 99%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에 대항해 일하지 않는 날, 주부들도 동참하는 의미에서 집안일 하지 않는 날, 일하는 기계만 양산하는 학교 교육에 반대하여 학교 가지 않는 날, 소비중심사회에 반기를 드는 소비하지 않는 날로 정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잡아 재치 있게, 재미있게, 그러나 간담 서늘하게 공격하는 일상의 전복을 일으키고 있었지요. 신자유주의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상위 1%가 되어라”라고 가르쳤지만, 젊은이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데이비드 그래버는 같은 글에서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근원적 상상력(Radical Imagination)”의 회복이라고 이름 했지요.

▲ ‘안녕들하십니까’ 묻는 대자보와 손팻말의 다양한 모습들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저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행렬에서 오큐파이 운동보다도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간 “근원적 상상력”을 발견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꿈꾸고 함께 바꾸어 나가자는, ‘공감’을 통한 상상력입니다. 웃음기 싹 가신, 선동적이고 자극적이고 상투적인 문구조차 제거된 수백 장의 진솔한 실명 대자보들이 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은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안녕함은 이웃의 안녕함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할수록 잘살게 된다”는 경쟁과 성과 중심의 가치관을 부추겨 온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거부입니다. “안녕들하시냐”는 가장 평범한 인사를 통해 “안녕해야 할” 기본권을 강탈하고 있는 사회가 잃어버린 근원적인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안녕들하십니까.” 이 인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품는 “근원적 상상력”은 예수의 말씀, 복음에서 우러나옵니다. 예수가 일생을 바쳐 씨앗을 심은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근원적 상상력, 복음을 토대로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한 몸이니, 내 이웃이 고통스러울 때 나 또한 고통스러워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는 사람의 도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1%의 권력과 금력으로 세워지는 겉만 번듯한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무통, 무감, 아픔도 시련도 없어 노닐고 거닐 일만 있는 유령들의 세상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는 이웃의 아픔을 통감할 줄 모르는 맘몬과 유령들의 세상이 유포하는 거짓 평화를 향해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말씀하셨죠.

때맞춰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신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교황은 돈이 사람과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 인간이 가장 먼저라는 것을 부정하는 세상을 가리켜 “인류의 위기”라고 표현했고 “하느님을 부정하는 가치관”에 물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자본주의 시장의 범주들 밖에, 즉 시장 논리의 통제 밖에 계십니다. (돈을 섬기는 금융인들, 경제학자들, 정치인들은) 하느님을 경영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을 위험한 존재로 여깁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모든 형태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완전한 형상을 이룩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2013년 5월 16일, 신임 대사들에게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권리인 ‘안녕함’을 말하기 위해 체제 밖을 상상해야 하다니,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부터 참으로 멀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2014년을 불과 며칠 앞둔 요즘, 저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인사 속에 담겨 있는 전복적인 성찰의 요구를 감지하고, 그래서 희망을 봅니다.

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세상으로,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고통에 천착하여 나만 행복하면 되는 ‘힐링’을 추구하기보다, 이웃에게 말을 걸며, 나의 아픔을 이웃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서로간의 신뢰와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이 안녕하지 못하기에 내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진리를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에 하느님도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이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안녕들하십니까?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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