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30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여러분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마태오 23,15)

14절은 모든 옛 사본에 빠져 있다. 예수의 두 번째 저주인 15절이 예수가 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5절이 생겨난 공동체에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이미 있었는지 물어야 하겠다. 둘째 저주는 첫째 저주와 이어져 있다. 사람들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온 세상을 헤맨다는 것이다.

유다전쟁(70년) 후 유다교가 얼마나 선교에 적극적인 종교였는지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당시 역사적 상황이 선교활동을 주저하게 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힐렐(Hillel)파 바리사이는 경쟁 세력이던 샴마이(Schammaj)파 바리사이보다 이방인의 개종에 더 열린 자세를 가졌다. 그러나 유다교의 선교 활동에 대한 문헌은 찾기 힘들다. 오늘 구절이 그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인용되니 말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초대교회처럼 활발한 선교여행을 다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바다와 육지’는 엄청난 노력을 뜻하는 표현이다. ‘겨우 한 사람’과 크게 대조시키려고 쓴 단어다. 프로셀루토스(proselutos)는 70인역 공동성서 이래 종교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침례와 할례로써 유다교 신도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킨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이 자기네 추종자를 만드는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설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되는, 유다교에 호감을 가진 이방인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다. 유다교에 호감 가진 이방인보다는 완전한 개종자를 율법학자들이 더 선호하였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그런 태도는 초대교회에서도 보인다. “바리사이파에 속했다가 신도가 된 사람 몇이 나서서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알려주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전 15,5)

유다전쟁 후 디아스포라(Diaspora, 방랑) 시절 유다교는 이방인에게 문을 닫지 않았다. 요세푸스와 필로가 유다교를 선전하는 책들을 펴낸 것도 그 시기다. 완전한 개종자는 할례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유다교에 호감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분적인 의무와 권리만 주어졌다. 유다교의 선교에 주로 인용되는 공동성서 구절은 이사야서 말씀이다. “나는 너를 이방인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이사야 49,6)

유다교의 그런 개종 노력을 오늘 본문은 비판하고 있다. 그렇게 얻은 이방인 개종자를 하늘나라의 자녀(마태오 8,12; 13,38)로 만들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는 개종자를 자기네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방인 개종자들이 율법 전체를 지키기는 쉽지 않았고 개종 이전의 환경과 교류하는 게 제한되었다. 그런 경험이 15절의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지옥의 자식’은 유다교적 표현이다. 디플로테론(diploteron)은 ‘그들보다 두 배나 더 나쁜’ 이란 뜻이다. ‘분열된’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해외선교 또는 개종과 연결하여 생각할 본문이다.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은 해외선교에 열성적이다. 그런 모습은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성직자들의 모자라는 취직자리, 국내 선교가 한계에 부닥친 현실과 물론 맞물려 있다. 해외선교에서 현지 주민들의 문화와 자존심을 존중하는지, 물량공세로 자본주의적 논리를 선교하는지, 복음과 무관한 미국적 가치관을 홍보하는지 잘 살펴야 하겠다. 조선에서 선교한 가톨릭에 프랑스적 가치가 개입되었고, 개신교에 미국적 가치관이 묻어온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개종자에 대한 태도를 또한 돌아보아야 하겠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반대 경우도 있다. 다니던 교회나 성직자에 대한 반발로 개종하려는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설득해야 하는가. 신도 숫자 늘리기에 유리하니 우선 받아들여야 하나. 사례 별로 처리할 문제인가. 개종 후에 다시 소홀해지는 신자는 어떻게 하나.

오늘 본문을 평신도 뿐 아니라 전업 종교인을 겨냥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겠다. 사람들을 신앙으로 안내하는 수고를 성직자가 크게 맡고 있다. 신자들이 신앙을 버리는 주요한 이유 또한 성직자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최악의 것들은 사제들에게서 나온다”고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은 말했다. “사제의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세속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아주 가벼운 주교 혹은 아주 가벼운 사제가 되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경고하고 있다.

교회개혁 없이 사회개혁 없다. 성직자개혁 없이 교회개혁 없다. 평신도보다 성직자가 먼저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교 개혁의 최우선 과제는 성직자개혁이다.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터져 나오는 추문의 대부분은 성직자의 작품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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