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3

15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 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한 끝에 16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17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봅니까? 19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이시오”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20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고 물으셨다. 21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22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마태오 22,15-22)

대본인 마르코 12,13-17을 마태오는 몇 군데 고쳤다. 마르코 12,13에서 보낸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인데 마태오에서는 바리사이들이다. 17절 첫 구절이 마태오에 덧붙여졌다.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코 12,14)는 마태오에서 빠졌다. “예수께서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시고”(마르코 12,15)에 마태오는 “위선자들아”(마태오 22,18)을 추가하였다.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주시오”(마르코 12,15)는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이시오”(마태오 22,19)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마르코보다 더 긴장감이 강조되고 있다.

바리사이파는 제자를 두지 않았다. 율법학자들은 제자를 두었다. 16절에서 마태오가 실수한 셈이다. 헤로데 당원은 마태오에서 여기에만 나타난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41-44 재임) 추종세력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바리사이파들과 동조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반대하였지만 로마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래서 로마에 대한 세금 납부 논쟁에 마태오가 그들을 끼워 넣은 것 같다.

15절 ‘말씀을 트집 잡아 올가미를 씌울까’(pagideuo)는 성서 그리스어에서 드물게 쓰이는 단어다. 유다교 문헌에서 빌려온 단어인지 뚜렷하진 않다. 유다교 문헌에는 그런 사람을 ‘인간사냥꾼’으로 표현하였다. 16절에서 사용된 ‘너그러움을 위장한 함정 질문’(captatio benevolentiae)이 그 좋은 본보기다. 겉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듯한 정중한 어휘와 문체를 사용하지만 속으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사악한 의도가 담긴 대화 수법이다. 우리 시대에도 인간사냥꾼은 신문과 방송, 인터넷, 심지어 페이스북(Facebook)에서도 날뛰고 있다. 6절 ‘선생님’은 거의 예외 없이 예수 적대자들이 예수를 부를 때 즐겨 쓰던 단어다.(마태오 12,38; 22,24.36) 선생님 호칭을 듣는다고 무턱대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16절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치켜세운 말은 못들은 척 하면 되겠다.

공통년(서기) 6년 로마 황제가 요구하는 세금이 유다 지방에 실행되었다. 12세 또는 14세부터 65세까지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종들도 바쳐야 하는 주민세였다.(tributum capitis) 모든 연령층에 똑같은 액수가 부과된 것 같다. 오늘 본문에 한 데나리온으로 나타나지만 그 정확한 액수를 우리가 알기는 어렵다. 유다전쟁 후 로마황제 베시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유다인에게 부과한 세금(fiscus Judaicus)은 2데나리온으로 성전세와 같은 액수였다.(마태오 17,24-) 그러한 세금 때문에 유다인들은 식민지 백성 신세를 뼈저리게 느꼈다. 하느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젤로데파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세금을 종교적으로 심각한 부담으로 여겼지만 결국 납부하기로 결정하였다.

18절 바리사이들의 양자택일 질문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린다. ‘예’라고 답하면 신학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아니오’라고 답하면 로마에 대한 저항을 선동한다고 몰리게 된다. 18절 예수의 반문은 바리사이들의 속셈 뿐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믿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간악함’(poneria)이란 말은 마태오복음에서 여기서만 보이는 단어다. 19절 예수의 질문에 바리사이들이 도리어 함정에 빠진 셈이 되었다.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지게 된다. 바리사이들이 성전 안에서 로마 화폐를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말았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함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예수가 로마 화폐를 지니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모습이 또한 드러난 것인가.

화폐는 권력의 상징이다. 화폐가 통용되는 지역은 통치권이 행사되는 지역과 동일하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통용되던 데나르는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은전이었다. 21절 예수의 해석은 말씀 후반부에 강조점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1. 국가권력은 하느님 권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2. 어떤 경우에도 국가권력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존중이 우선이다. 3. 국가권력과 하느님에 대한 존중이 충돌할 경우에 마땅히 하느님을 따르라. 세금을 납부하는 점에서 같은 입장인 바리사이와 예수 사이의 논쟁이니 그런 점이 더 뚜렷해졌다. 박해 중에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하느님에 대한 존중을 제1로 삼으라는 마태오의 간곡한 당부가 담긴 본문이다.

만일 예수의 답변을 로마 군대가 들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로마군대가 만족할 만한 답변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젤로데파가 예수에게 질문하고 그런 답변을 들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수의 답변이 자신들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로마 식민지 처지에서 하느님 나라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이미 로마에 저항하는 체제전복적인 사상이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 것은 로마식민지와 하느님나라로 대비되었다. 공식으로 표현해보자. 카이사르:하느님=로마식민지:하느님나라. 예수의 핵심 메시지인 하느님나라가 주는 정치적 의미를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오래도록 외면해 왔다. 그리스도교가 체제유지 세력으로 둔갑한 이후 그렇게 되었다.

오늘 본문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잘못 사용되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불의한 권력에 협조하는 종교인들은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오늘 본문과 로마서 13,1을 마치 알리바이처럼 즐겨 써먹는다. 악마도 성서를 능숙히 인용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흉기처럼 성서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도 있다.

교회와 권력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굴곡을 겪어 왔다. 그러나 예수의 오늘 말씀은 그 의미가 뚜렷하다. 불의한 권력에 교회는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 불의한 권력에 교회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협조하는 교회라면 교회라고 부를 수도 없고 교회라고 자처할 수도 없다. 오늘 본문에 담겨진 저항적 요소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면 시대를 보는 눈도 밝아지게 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