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대부분 아시겠지만, 풍자적인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성당의 사제에게, 한 재산 많은 노부인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애견도 천국에 가길 원하니 세례를 주면 성당에 적잖은 봉헌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본당 사제는 그렇잖아도 성당 건물 보수를 위해 비용을 어떻게 모을까 고민하던 중이라 잠시 생각한 후, 차분히 개에게 버나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줬습니다(알프스 구조견으로 유명한 세인트 버나드가 떠올랐던 겁니다). 덕분에 본당 건물을 근사하게 보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주교의 귀에 들어간 거 있죠. 주교는 이 본당 사제를 호출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졸이며, 주교께 인사를 드리고는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하다고 선수를 쳤습니다. 본당 신부를 잠시 물끄러미 보던 주교가 입을 뗐습니다. “그 개는 언제 견진 받는답니까?”

반려동물들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는 요즘에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오늘 속풀이의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면, 견진성사는 주교의 권한인 것이 분명합니다.

▲ <견진>, 니콜라스 푸생, 1649년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와 함께 중요한 입문(신앙에 들어선다는 의미) 성사로서 성령의 은사를 전해주고, 신자의 신앙을 굳건히 해준다하여 견진(Confirmation)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으로써 죄에 짓눌린 상태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인이 됨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 새로운 탄생의 의미에 비해 견진성사는 ‘성장’의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흔히 신앙적인 성인식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즉,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들이 신앙적 · 영적 성장을 하게 되었고 계속 굳건히 성장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성령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견진성사를 위해서는 성령에 대한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견진성사를 세트로 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두 성사 사이에 시차를 두고 있습니다. 어른으로서 세례를 받는 이들은 이 두 성사가 같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아나 어린이가 세례를 받았다면, 이들은 적어도 열두 살 이상의 연령이 되어야 견진을 받기에, 두 성사 사이의 시간적 간극이 뚜렷이 생깁니다.

본당에서 견진은 세례성사에 비해 수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교좌성당이 아닌 본당에서는 보통 2~3년 정도에 한 번씩 신자들을 모아서 견진을 줍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해당 교구의 주교나 보좌주교들은 관할 지역의 본당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지역 본당 신자들이 주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대개 견진성사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저도 견진 받을 때,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마에 기름을 발라주시고 안수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안수는 사도들이 세례 받은 이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는 예식으로 거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기름을 바르는 예식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사도 8,14-17)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를 안수라고 합니다. 이처럼 견진성사의 배경에는 특별히 사도들의 행적이 있습니다. 그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오늘날, 교구를 책임지는 주교들입니다. 따라서 견진성사의 권한은 고유하게 주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권한을 다른 사제에게 위임할 경우에 주교가 아닌 사제가 견진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교의 위임과 상관없이 사제들이 견진을 줄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죽을 위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본당 사목구 주임뿐만 아니라 어느 사제도 줄 수 있습니다(교회법 883조 3항). 얼마 전에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하시는 선배 신부님의 근황을 페이스북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이분의 짧은 단상을 감상하시며 이 주의 속풀이를 마치겠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95세의 할머니에게 세례와 견진을 모두 주었다.

말할 기운도 없으신 분이 아멘 소리를 크게 하며,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모습을 보니 목이 메어 계속 침을 삼키며 경문을 읽었다.

옆에 서 계신 큰따님은 어머니와 사후 수습 이야기를 이미 나누었는지,
돌아가시면 화장시켜드려 한국 납골당에 모실 거라고 하신다.
귀국하시기 전에 유골함을 모시고 성당에 오시겠다는 말씀을 들으니
시간은 개인의 죽음과 관계없이 흐른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

내가 살아있는 오늘이 너무 소중하다.
목숨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 깨어 있는 오늘이고자 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오늘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