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주일이 벌써 32회를 맞이했다. 인권주일은 광주항쟁으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구속되고,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해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구속된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내린 중대한 결정이었다. 1982년 10월에 열린 한국 천주교 추계 주교회의는 매년 대림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정하고 인권운동을 교회적 차원에서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그해 12월 5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첫 번째 인권주일 담화문을 통해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첫 번째 인권주일 담화문은 먼저 국가보안법 남용을 지적했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유신시대에 긴급조치와 반공법이 정치보복과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된 사례를 지켜보아 왔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무차별 적용과 처단으로 국사범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혼동을 가져오게 하고 관제 공산주의자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신앙공동체의 활동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처벌되는 사례를 보고,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교회의는 “인간의 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명령에 의하여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거나 자신의 일터와 배움터에서 추방당한 모든 사람들의 석방과 복직과 복학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광주항쟁 관련자, 5.17 사태와 관련한 정치범,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수의 양심수들의 석방과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자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인권과 사회정의에 있어서도 희망의 표적과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가톨릭교회의 이처럼 열화 같은 반발 때문에 이듬해인 1983년 8월 12일 광복절 특사로 최기식 신부를 석방했으며, 김현장과 문부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이게 바로 인권주일의 역사적 힘이며 실제적 의미다. 인권주일은 단순히 연중 행사의 하나로 ‘한번쯤’ 인권의 존엄성을 기억해보자고 마련한 것이 아니다.

사회교리 주간은 이명박 정권의 막가파식 4대강 공사를 한국 천주교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대대적으로 반대하는 가운데, 2011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다. 교황청에서 발간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분명히 언급하고 있으며, 역대 교황들이 지난 120년 동안 줄곧 발표해 왔지만, 한국 교회에서 그동안 잊혔던 사회교리를 다시 읽어보고 사회정치적 판단과 실천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게 주교들의 요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마저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면서 정치 참여를 신자들에게 호소했다.

▲ 2013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서울주보> ⓒ한상봉 기자

그런데 지난 12월 8일자 <서울주보>는 인권주일과 사회교리 주간이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표지에는 ‘인권주일’임이 명시되어 있지만, 주보에 실린 주요한 내용은 대부분 ‘생명수호주일’을 연상시킨다. <서울주보> 3면에는 그 많은 교회 문헌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낙태한 여성들에게 “그 일은 심각한 잘못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라며 고해성사를 요구하고 있는 회칙 <생명의 복음> 99항을 넣었다. 물론 생명 문제도 인권주일과 상관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현저하게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요즘, 인권주일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한가로운 이야기로 비친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추기경이 교구장으로 있던 2008년부터 12월 첫 주일을 ‘생명수호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때때로 인권주일인 대림 제2주일과 생명수호주일인 12월 첫 주일이 겹치는 경우도 있어서 난감할 때도 있다. 문제는 이번처럼 두 날짜가 겹치지도 않는데, 인권주일을 생명수호주일처럼 지내는 것이 문제다. 더군다나 <서울주보>에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이용훈 주교 명의로 발표한 ‘인권주일과 사회교리 주간 담화문’을 아예 싣지 않았다.

교구 주보에서는 주교회의에서 발표하는 담화문의 요약본을 싣는 게 관례다. 이번에도 대부분의 교구에서는 이 담화문 요약본을 주보에 실었는데, ‘일치’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는 주보를 통해서라도 주교회의의 입장과 권고를 신자들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가 시국미사와 박창신 신부의 발언으로 언론매체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도권은 시국미사와 박창신 신부의 발언에 대해 신자들이 복음적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대교구는 사목적 의무를 저버린 셈이다.

이용훈 주교는 담화문에서 “국가권력의 불법적 선거개입과 이에 대한 은폐축소 시도”를 비판하고, “정보기관과 경찰, 그리고 군대 등 국가의 권력기구를 시민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본질”이라며 “국가권력이 법률과 사회적 합의로 정한 한계를 넘어선다면, 권력은 그것 자체로 불법이며 시민의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에 대한 침해일 따름”이라고 강조했다. 인권주일이 생긴 이유 자체가 가장 긴급하고도 절실한 사회적 요구에 교회가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서울대교구 주보의 정의평화위원회 담화문 생략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이번 인권주일 주보에서 정의평화위원회 담화문이 생략되면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에서 인권주일 담화문을 주보 간지 형식으로 별도 제작해 각 본당에 배포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간지는 본당 사제의 재량에 따라 신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주교회의의 공식 입장이 본당 사제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폐기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신자들의 정보접근권이 훼손되는 것이고, 교구가 이를 방조한 셈이 된다.

▲ 2013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 · 인권주일 · 사회교리 주간 <의정부주보> ⓒ한상봉 기자

이런 점에서 2004년에 서울대교구에서 분가 신설된 의정부교구의 주보가 돋보인다. 의정부교구 주보는 전체 11면 가운데 표지와 ‘신자들의 신앙의식과 신앙생활’에 관한 분석 글과 교회 소식란을 빼면 6면이 사회 문제와 사회교리, 인권주일 담화문에 할애되어 있다. 표지에서도 ‘인권주일’임을 알리며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동행하고 연대하면서, 우리 사회가 더욱더 인간의 존엄성이 보호되고 증진되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인권주일 담화문 내용을 상단에 소개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서울대교구에서는 인권주일이 불편한 주일이 되었다. 인권과 시국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제들조차 시국선언에 참여한 자신들의 명단을 밝히기 꺼리는 교구가 되었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하고, 사제들이 ‘대통령 사퇴’마저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한국 교회에서 유일하게 시국미사를 봉헌할 수 없는 교구가 되었다.

명동성당은 대규모 개발 공사로 소음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은 명동성당을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다. 명동성당 안내지에는 여전히 ‘민주화의 성지’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은 더 이상 명동성당에 기대하지 않는다. 서울대교구는 신앙의 해 폐막미사에서 ‘공동선을 위한 정치는 신앙인의 의무’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마저 거슬러 사제들의 정치 참여에 쐐기를 박았다. 슬픈 현실이다. 이날 우리들의 신앙도 막을 내린 것은 아닌지.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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