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117

12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3 그리고 그들에게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하고 나무라셨다.

14 그때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이 앞으로 나오자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5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이며 성전 뜰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치밀어서 16 예수께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립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들립니다. ‘주께서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힘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본 일이 없습니까?” 하고 대답하셨다. 1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성 밖에 있는 베타니아로 가셔서 밤을 지내셨다. (마태 21,12-17)

▲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환전상을 몰아내시다>, 렘브란트, 1626년
마르코는 예수의 성전 항쟁 사건을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음날 사건으로 보도하지만 마태오는 그것을 첫날 사건으로 바꾸었다. 본문은 성전 항쟁(12-13), 치유(14), 유다교 지배층과 예수의 논쟁,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대본인 마르코 복음서 11,15-17을 마태오는 여러 군데 손질하였다. 성전 뜰에서 물건 나르는 것을 금한 구절(마르 11,16), 예수를 죽이려는 유다교 지배층의 모의(마르 11,18) 부분은 삭제되었다. 14절의 치유와 17절의 ‘읽어본 적 있느냐’ 부분이 덧붙여졌다.

12절의 성전 뜰은 이방인들의 마당을 가리킨다. 거기서 성전 시장이 열려 제사에 필요한 짐승 매매와 성전세를 납부할 돈이 환전되었다. 성전 시장은 순례객의 편의를 위해 열렸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제사에 쓰일 짐승을 멀리서 가져오면 부패 위험이 생긴다. 환전을 아무 데서나 할 수는 없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이었다(레위 5,7).

예수가 여러 번 예루살렘에 왔었는데 왜 이 시점에 성전 항쟁을 벌였을까. 올리브 동산에 있던 성전 시장과 경쟁시키려고 대사제 요셉 가야파스는 30년 초에 새로운 성전 시장을 이방인의 마당에 열게 하였다. 성전 안에서 열리게 된 성전 시장을 예수가 반대한 것 같다. 12절의 “다 쫓아내시고” 부분은 마태오가 이 사건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치유 활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마태오는 14절에서 보도한다. “이리하여 소경과 절름발이들은 왕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2사무 5,8)를 들어 일부 학자들은 14절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장애인과 거지들은 성전에 자리를 차지하였다(요한 9,1; 사도 3,1).

15절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분노는 성전 항쟁보다 치유 행위에 근거한다고 보는 마태오 주석의 대가 루즈(Luz)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성전 항쟁보다 치유 행위가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하다고 보는 루즈의 의견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예수의 죽음의 원인은 예수의 치유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 항쟁에 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보도된 치유 활동보다 성서에서 예수의 유일한 폭력 행위인 성전 항쟁이 오늘 본문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

예수의 성전 항쟁 의미에 대해 성서학자들 사이에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여러 해설이 등장하였다. 첫째, 예수가 메시아임을 보이기 위한 정치적 행동으로 보는 해설이 있다. 성서학자 라이마루스(Reimarus)를 선두로 카우츠키(Kautsky), 브랜든(Brandon), 그리고 성서학계 밖에서 자주 역설된다. 성서 전반에 드러난 예수의 모습과 크게 다른 주장이다.

둘째, 예언자적 상징 행위로 보는 의견이 있다. 축구장 두 배 넓이의 이방인의 마당에서 예수 혼자 모든 상인을 추방했다고 보기 어렵다. 성전 경찰이 예수를 체포하지 않았고, 상인들에게 예수가 봉변을 당하지도 않았다.

셋째, 참된 제사를 세우기 위한 행위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Roloff). 이 관점에서 ‘성전 정화’라는 명칭이 선호된다. 그러나 이방인의 마당은 거룩한 구역이 아니고 예수의 활동 자체가 제사를 방해하는 행위다.

넷째, 마르코 복음서 14,58을 들어 성전 몰락을 상징한다고 여긴다(Sanders). 마르코 복음서 11,16이 이 주장과 모순된다.

다섯째, 유다교 지배층의 경제활동에 반대하는 상징적 행위로 본다(Jeremias, Luz). 성서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의견이다. 성전 항쟁이란 명칭이 여기에 어울린다.

조국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에서 시달리는 모습에 예수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예수는 절대로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런 고뇌를 상상이나 할까. 로마 군대에 빌붙어 경제적 이익에 매달리던 유다교 지배층을 예수는 얼마나 미워했을까. 점잖은 토론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예수는 그들의 멱살을 잡고 귀싸대기라도 후려쳐야 할 장면이다. 비폭력을 외친 예수이기에 대인(對人) 폭력이 아니라 대물(對物) 폭력으로 마감했을 뿐이다.

종교 단체가 고용주가 되고 수익 사업을 벌일 때 종교 지배층은 누구 편을 들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교회가 고용주가 될 때의 모습은 개인이나 기업의 모습과 다른가. 가톨릭교회가 학교, 병원, 언론기관의 소유주일 때 어떻게 처신하던가. 전교조, 병원노조, 방송노조 사태에서 교회가 보인 모습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울리던가.

그런 사건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위배한 성직자는 처벌을 받던가. 신자들의 헌금으로 설립된 기관은 종교 지배층의 개인 소유물인가. 성직자들이 돈 관리를 맡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교회의 돈 관리를 성직자가 맡는 속사정은 무엇인가. 신자들의 헌금을 교회는 어떻게 관리하고 운용하는가. 교회가 하고 있는 수익 사업은 복음 정신에 어울리는가. 교회가 소유한 부동산 등 재산 현황은 복음 정신에 걸맞은가. 교회는 왜 그리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는가.

성서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마태 12,3.5; 19.4; 21.42) 하고 예수는 묻는다. 주교, 목사, 신부, 그리고 신학자에게 ‘당신들은 성서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예수가 묻는 것 같다. 주교는 잘못할 수 있어도 주교의 말을 따르는 신자는 잘못이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주교도 있었다. 그런 신자들은 주교의 잘못 때문에 희생되는 억울한 피해자다. 한국 주교들은 성서에 손을 얹고 대답해보라. 교회의 재산 관리와 복음 정신 실천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

오늘의 본문은 그리스도교의 경제활동에 대해 심각히 질문하고 있다. 오늘 본문이 그리스도교에게 남의 일로 들리진 않겠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을 예수는 비판하였다.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어디가 강도의 소굴인가.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명동성당, 순복음교회, 소망교회에서 예수가 오늘의 본문처럼 난동을 피웠다고 상상해보자.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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