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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 나선 우리식구들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⑥- 열한 살 때 (1950년)

 

   

동네 사람들이 한 집 두 집 피난보따리를 싸서, 이고 지고 들고 떠나기 시작했어. 우리집 옆 제방에 올라가 보니, 벌써 안동쪽 신작로가 피난민으로 꽉 찬 채, 그 인파가 안동쪽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고, 할머니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랑 피난보따리를 싸기 시작하셨어.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일흔하나, 할머니 갑년(회갑)에 내가 태어났으니까 나는 할머니와 동갑인 경진생(庚辰生)이니 열한 살, 형이 열세 살, 여동생이 아홉 살과 일곱 살이었지.

할머니의 지시대로, 형과 나는 작은 배낭에 쌀을 가득 담고 그 위에 돗자리 하나씩 묶어서 짊어졌고, 아홉 살 난 여동생은 양은솥과 밥그릇 수저 따위 식사도구와 소금을 머리에 이고, 할머니는 어리고 몸이 약한 일곱 살 손녀의 손을 잡고 걷기도 업기도 하시면서, 피난인파에 밀려 남으로 남으로 흘러갔어. 헤어질까 봐 가까이 붙어서, 자주자주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해 가면서......

어떤 사람은 지게에 노인이나 아이를 지고 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소달구지에 피난보따리를 싣고 그 위나 그 뒤에 노인이나 아이나 임신한 여자를 태우고 가기도 했는데, 더 빨리 가고 싶어도 피난인파 때문에 더 빨리 갈 수가 없었지. 그저 피난물결에 따라 흘러갈 뿐이었어. 그㎞?7월 한여름 땡볕더위이기도 했지만, 인파열기와 쫓기는 신세라서 모두가 축 처진 몸으로 터벅터벅 마지못해 발을 옮기도 있었지. 가끔 엄마 찾는 아이들 울음소리, 아이 찾는 어른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가다가 때가 되면, 아무데나 앉아 소금 반찬으로 도랑물에 밥 한 술 지어 먹고, 또 걷고...... 어떤 사람들은 채 익지도 않은 남의 수박이나 참외를 따서 한 입 베어먹다가 퉤 하고 뱉으며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하고...... 가다가 남의 집 처마 밑이나 헛간이나 냇가 돌밭에서 자기도 했는데, 천근만근 파김치가 된 몸인데도, 냇가 돌밭에서 잘 때는 등에 주먹만한 돌들이 받치니까, 마치 고문(!)을 당하듯 고통스러워 잘 수가 없더군.

무릎이 퉁퉁 부은 할머니가 막내 손녀를 업고 가시고, 아홉 살 난 어린 여동생이 무거운 취사도구를 이고 아무 불평도 없이 잘도 가는데, 형이나 나는 쌀이 든 배낭이 너무 무겁다고 불평하며 자꾸 쉬다 가자고 조르고, 형은 성격이 급해서 배낭에 든 쌀을 냇물에 쏟아버리려고 해서, 할머니의 속을 썩혀드리기도 했지. 피난길에 나선 우리식구들은, 할머니가 믿음직한 가장이셨고, 아홉 살 여동생은 당당한 살림꾼이었지만, 형과 나는 철부지 말썽꾸러기였어. 나는 내성적이라 겉으로 내색을 덜하는 편이지만, 형은 느끼는대로 당장 내뱉는 직선행동파였거든.

피난길에 아홉 살 여동생이 없었다면, 우린 굶어죽었거나 할머니가 손자들 때문에 속에 천불이 나서 돌아가셨을런지 몰라. 때가 되면 할머니 지시대로, 땔감을 마련해 밥을 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 양식이 떨어졌을 땐, 빈 집을 찾아다니며 몇 줌의 겉보리라도 찾아내어, 절구에 淄?보리죽이라도 끓여서 먹게 한 사람은 전적으로 아홉 살 여동생이었어. 생각할수록 부끄럽고도 고마운 추억이야!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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