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6]

지난 봄, 신학개론 수업 시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수업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질문했던 것은,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제가 가르치는 학교는 성 요셉 수녀회가 설립한 가톨릭 대학이지만, 학생들은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무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와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제 수업으로 인해 자신의 종교와 신앙에 대한 도전을 받는다거나 개종을 고려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은 제 의도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성육(Incarnation)과 죽음과 부활을, 단순한 개념 차원이 아닌 의미로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교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학생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질문이었지요. 탁월한 저서들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교 언어와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읽히고 토론하여 의미를 새기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습니다.

▲ 존 듀이건 감독의 영화 <로메로>
고민 끝에 제가 선택한 것은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의 글과 그의 삶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내전이 한창이던 때 1980년, 군부 세력의 인권 유린과 공포정치를 비판하고 가난한 엘살바도르의 민중을 대변하다 극우 군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지요.

보수적인 전통주의자로 알려졌던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민중의 고통과 혼란과 두려움을 함께 겪으며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처럼, 교회 건물을 벗어나 거리로 나아가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만나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예언자적 소명을 자각하게 된 것이지요. 비극이 있기 전 군부 세력의 협박을 받을 때마다 로메로는 이렇게 예언했다 합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저는 학생들에게 로메로가 남긴 강론을 발췌하여 읽히고, 존 듀이건 감독의 1989년 영화 <로메로>를 보여준 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로메로의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지, 또 로메로의 죽음이 어떻게 엘살바도르 민중의 삶으로 부활하는지, 연결 고리를 토론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찾아내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메로가 민중을 만나 회심하는 장면에서 한 무슬림 학생이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입니다. 학생의 이름은 알람(Ahlam), 올해 서른 살입니다. 고향 소말리아를 떠나 미네소타에 정착한지 이제 5년이 된 알람은 계속되는 내전과 굶주림과 일상의 폭력에 시달리던 고향에 대한 슬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기들과 함께하는 수업에서도 늘 열심이었습니다. 독실한 무슬림인 그녀는 히잡을 둘러쓴 채 얼굴만 드러내고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생소하기 그지없을 신학개론 수업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듣고 또 받아 적고는, 그것도 모자라 수업이 끝나면 연구실에 찾아와 질문을 하던 친구였지요. 한번 울음을 터뜨린 알람은 로메로가 미사를 집전하다 암살되고, 이어 생전에 남긴 강론이 배경으로 깔리며 엘살바도르 민중의 현재 삶을 보여주는 엔딩 크레딧에 이르자 거의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저와 다른 학생들은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기다려야 했지요. 눈물 콧물이 다 잦아든 후, 고맙게도 알람은 자신의 생각을 저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군부가 민중을 살상하는 장면들이 고향에 대한 기억과 겹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는데, 군인들에게 폭력적이고 수치스러운 취조를 당하는 로메로를 아길라레스 농민들이 감싸고 보호하며 “신부님은 우리들의 목소리에요. 우리를 대신하여 저들에게 말하는 사람이에요”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만 감정이 복받쳐 올랐답니다.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Voice of the voiceless)”가 되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절실하게 다가왔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인가 그녀를 쳐다보던 학생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알람의 눈물 덕분에 그날 토론에서는 모두에게 특별한 기억이 될 만큼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우리는 영화 속 엘살바도르, 또 알람의 고향을 지배하는 폭력과 죽음의 질서에 대해 함께 분노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로메로를 통해 어떻게 엘살바도르 민중의 희망으로 되살아나는지, 어떻게 죽음의 질서를 전복하여 삶으로 회복시키는지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때로 제가 만나는 학생들의 경험의 깊이와 고통의 기억이 강단에 서있는 저를 압도하며, 책보다 더욱 강렬하게 복음과 삶을 연결할 때가 있습니다. 그날이 그랬습니다.

▲ 지난 8월 29일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시국미사 ⓒ한상봉 기자

엊그제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 관련 신문 기사들을 읽다가 몇 개월이 지난 이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신부님들의 시국미사와 관련하여 성직자의 정치 참여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작금의 논의가 참으로 엉뚱하게 느껴집니다. 부당한 권력과 잘못된 재물이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때, 정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질서를 깨우치는 것은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일 뿐 아니라 교리서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교회의 사명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46항).

또한 사제단 신부님들이 “사제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가 사제의 사명이고, “신자들에게 도덕적, 영성적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 사제의 의무라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와 “인간의 성화”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염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아 살기 원한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의 함의를 잊고 삽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은 초월적이고 비물질적인 하느님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어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필리 2,7) 되신 그리스도는 찬란하고 안락한 교회의 제대에 누워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비루하고 땀나는 삶의 현장으로, 정의와 불의가 혼재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폭력과 착취가 난무하는 맘몬의 지배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 진흙탕을 살아내고,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의 희망을 선물로, 또 숙제로 넘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에는 살 냄새, 피 냄새 나는 구체적 삶의 자리와 역사의 부름에 대한 성찰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길에는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의 비난과 소외와 질타가 지뢰처럼 깔려 있습니다. 그런 길을 마다 않고 걸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이 복음 전파이며, 이는 사제와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그런 살과 피와 땀의 현실을 묵과한 채 교회에 들어앉아 눈치를 보도록 권하는 것이 오히려 사제로서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성서와 가톨릭 교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무슬림 학생 알람은 그날 그 수업에서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된다는 말의 울림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성육과 부활의 의미를, 또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의 의미를 아마도 그날 어느 누구보다 선명하게 가슴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과 경험이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던 까닭입니다.

복음의 의미가 삶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오는 모든 순간이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 사건의 재현이며, 복음이 사람과 함께 살고, 죽고, 또 되살아나는 모든 순간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복음은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를 닮아 살겠다는 우리는 삶이 빠져나가버린 껍데기 복음을 붙잡고 삽니다. 복음을 아무리 읽는다 한들, 삶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호수에 던진 돌멩이 소리처럼 둔탁한 파열음만 퍼져 나올 뿐입니다. 살과 피와 땀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듯, 살과 피와 땀을 어우르지 않는 복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또한 사람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와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람을 살게 하는 사회, 복음이 뿌리를 뻗칠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회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그렇게 분연히 일어나 복음의 토양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조민아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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