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8

1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는데 2 사람들이 또 많이 몰려 왔으므로 거기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3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5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습니까?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7 그들은 다시 모세는 ‘아내를 버리려 할 때에는 이혼장을 써 주라’고 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8 예수께서는 “모세는 여러분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9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행한 까닭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10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12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 들이시오.”(마태오 19,1-12)

예수는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향 갈릴래아를 떠난다. 유배길도 아니요 망명길도 아닌 죽음을 향하는 여정이다. 인간적으로 그 심정이 오죽할까. 마르코복음과 달리 군중들이 예수를 계속 따라간다. 예수는 생애 끝까지 아픈 사람을 고쳐준다.

3절 바리사이파의 질문은 당시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 사이에 토론되던 주제다. 힐렐은 아내가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샴마이 학파는 음행의 경우에만 이혼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이혼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이혼 근거에 대해 논의되었음을 알려준다. 마태오는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들을 같은 집단으로 처리했다. 그들 의견이 모두 예수의 생각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4절에서 예수는 창세기 1,1 아르케(arke, 처음)를 인용한다. 그 단어는 창조와 구원 역사의 시작을 가리킨다. 유다교 해설과 다르게 그러나 꿈란 공동체처럼 예수는 결혼을 창세기 1,27과 연결한다. 남자와 여자는 한 몸(창세기 2,24)이라는 표현은 성적 결합을 가리킨다. 랍비들은 그 구절을 이방인을 위한 결혼규칙의 근거로 사용했다. 7절에서 모세의 계명과 창조주의 행위가 맞서 있다고 마태오는 강조한다.(마태오 22,24.31) 조상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이 대립하는 대목은 이미 등장했다(마태오 15,2-4) 유다교는 창조주의 의지와 모세의 계명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존중한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예언자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토라를 주셨다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이 토라의 일부가 가치가 적다거나 틀렸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 1311년
마르코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계명(eneteilato)을, 예수는 모세의 허락을(epetrepen) 말했는데, 마태오에서 그 단어가 뒤바뀌어 쓰여졌다. 아내의 성적 불충실에 대한 이혼은 유다 남자들에게 의무였다. 마태오 공동체에서 유다교의 이혼장 규정(신명기 24,1-4)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 9절에서 포르네이아(porneia, 음행)의 경우에 남편은 결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드시 중단해야 하는가.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 9절에서 ‘음행한 까닭 외는’ 이혼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재혼을 가리키는가. 전자를 가리킨다면 재혼을 금지하는 가톨릭 입장에 서게 되고, 후자를 따른다면 재혼을 허용하는 그리스 정교회와 개신교 입장에 서게 된다. 본문 내용상 어느 경우를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10-12절 예수의 말이 금욕을 미화하거나 결혼과 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복음적 권고’와 가톨릭 사제 독신제 논의가 향하는 고전적 구절이다. 그러나 사제의 평생 독신제, 성욕 극복, 하느님나라에서 독신이 더 가치 있다는 주장을 이 구절에 근거해서 펼치는 가톨릭 성서학자는 요즘 드물다. 12절 말씀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성과 사랑이 하느님나라의 기쁨을 나타내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예수가 생각했다는 말인가.

마태오 시대와 우리 시대는 결혼과 이혼 문제에 대해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결혼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일부였다. 오늘은 그런 가부장적 구조를 극복해 나가야 할 시대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결혼 관련 구절들은 그런 면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구절은 남성의 시각에서 우선 남성 독자를 향하여 쓰여졌다. 이혼한 여성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았고 남성의 음행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마태오는 여성의 음행과 남성의 이혼만 다룬 것 같다. 남성의 이혼조건을 까다롭게 해서 남녀평등의 길로 조금 다가서긴 했지만 남녀평등이 마태오의 목적은 아닌 듯하다.

결혼과 이혼 문제에 있어서 예수는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심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였을까? 이혼당한 여성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예수는 충분히 강조하였는가. 모든 이혼에 관한 엄밀한 법적 규정, 이혼자의 재혼을 간음으로 표현한 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혼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요한 7,53-8,11의 간음한 여인 이야기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벌써 예수의 가르침을 완화하는 자세를 취했다. 마태오의 예외규정 뿐 아니라 바울의 고린토전서 7,12-16이 그 예다.

이혼 문제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고집한다 하더라도 이혼자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차가운 시선은 크게 바뀌어야 한다. 결혼도 못해본 가톨릭 사제들이 이혼이 무엇인지 짐작이나 할까. 이혼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혼에 대한 규정은 그 중요성에 있어 육화,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와 같은 최고 등급의 교리에 속하진 않는다. 이혼자들이 교회 안에서 현실적으로 느끼는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가톨릭교회가 이혼자를 냉대하여도 하느님은 그러시지 않는다. 하느님 그릇과 교회 그릇이 어찌 같을까. 하느님이 설마 친정 아빠보다 못하실까.

이혼자의 아픔에 대한 배려가 결혼과 이혼을 가볍게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일부 풍조를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를 존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삶은 여전히 아름답고 존중된다. 결혼해도 행복하고 독신으로 살아도 행복하다. 독신이 결혼보다 신학적으로 우위에 있지는 않다. 어떤 가족제도를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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