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⑤- 열한 살 때 (1950년)

 


어느 날 저녁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말씀하셨어.

"어머님, 우리식구는 영주에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제가 먼저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 곧바로 내려오겠어요." "이사를 가겠다는 거냐?" 할머니가 물으셨고, 형인지 동생인지 "그럼 우린 아버지랑 함께 사는 거지?"라고 물었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그런 얘기 함부로 하면 못쓴다"며 우리들에게 오금을 박으셨어.

며칠 후 어머니는 당시 다섯 살인 막내 남동생을 데리고 청량리행 기차를 타셨어. 형과 나는 그 친절하신 총각 형사님의 초청으로 그분 집이 있던 제천을 가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어머니와 같은 기차를 타게 되었지. 어머니와 막내 동생, 형사아저씨와 형과 나, 이렇게 다섯이 같은 기차 같은 칸 옆자리에서 삶은 달걀도 사 먹으면서 가게된 거야. 신나는 여행이었지. 어머니는 형과 나에게 "제천아저씨 집에 있는 동안, 아저씨 걱정 끼치지 말고, 예정대로 사흘간 놀다가 집에 돌아가거라. 나도 서울 일이 끝나는대로 빨리 내려갈께." 그리고 아저씨에게 "동생! 여러모로 고마워. 아이들 부탁하네, 영주에서 만나세." 뭐 이런 말씀을 하신 것같아. 우리 셋은 제천역에서 내려 기차승강장에 선 채, 차창 밖으로 얼굴과 손을 내민 어머니랑 서로 손을 흔들었지. 기차가 안 보일 때까지......

친절하신 형사아저씨 집에서 3일간 재미있게 놀다가, 아저씨랑 함께였는지 우리끼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영주로 돌아왔어. 할머니께서 "너희 에미가 서울 가서 애비 만나 살 집을 마련하고, 우릴 데리러 오실 거다"라고 하셨지.

그런데, 그리고 5일 후, 결국 6ㆍ25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어. 기차칸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날이, 6ㆍ25전쟁 8일 전이니까, 6월 17일이었을 거야.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가족도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지.

그 후 만나거나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나요, 할아버지?

피난 가는 날까지 우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밤새 바깥 외등도 켜놓은 채...... 할머니는 주무시지도 못하고 밤새 독한 담배만 피우시며 한숨만 쉬셨어. 전쟁과 올망졸망 어린 것들 넷을 앞에 두고, 속을 까맣게 태우셨을 할머니를 철이 없던 우리는 까맣게 몰랐었지. (계속)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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